노정태 칼럼
"상법이나 노란봉투법은 원칙적 부분에 있어서, 세계적 수준에서 노동자라든가 상법 수준에서 원칙적으로 지켜야 할 부분이 있다."
지난 19일 이재명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에 동행하게 될 경제인들과 가진 간담회 자리에서 한 말이다. 흔히 '노란봉투법'이라 불리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과 상법 개정안에 대한 우려가 빗발치는 가운데, 그것을 강행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우선 드는 의문. 이 대통령이 말하는 '세계적 수준'이란 대체 어느 나라를 기준으로 한 것일까? 같은 날 주한미국상공회의소는 더불어민주당을 찾아 "미국 기업에서 노란봉투법에 대해 많은 우려를 한다"고 밝혔다. 일단 미국 기준은 아닌 셈이다.
유럽은 어떨까? 주한 유렵계 기업 400여 곳을 대변하는 주한유럽상공회의소(ECCK) 역시 노란봉투법에 대해 이미 우려를 밝힌 바 있다. 지난 7월 28일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노란봉투법이 국회 환경노동위 전체회의를 통과하자, ECCK는 노란봉투법이 시행될 경우 "한국에서 철수할 수도 있다"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유럽 기준에서 보더라도 과도한 법이라는 이야기다.
팩트는 분명하다. 노란봉투법이 따르고 있다는 '세계적 수준의 원칙'은, 미국식도 아니고 유럽식도 아니다. 그럼 대체 어디일까? 일본식도 아닐 것 같다. 필자가 과문한 탓에 우리가 바람직한 모범으로 따를만한 경제 강국이 그 외에 어디 또 있는지는 모르겠다. 지난 민주당 정권의 구호를 빌자면, 노란봉투법은 우리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로 인도하고 있다는 불안감을 떨치기 어려울 뿐이다.
유럽은 한국의 진보 진영이 늘 금과옥조로 삼는 곳이다. 노동자의 권리를 자본의 이익보다 중요시한다는 EU의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노란봉투법은 지나친 법이다. 노동조합의 손해배상 범위를 제한하는 3조가 아니라, '원청'의 범위를 무한정 늘릴 수 있게 하는 2조가 문제다. '원청에 책임을 물어야 산재가 줄어들 것 아니냐'는 식의 단순한 사고방식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ECCK의 입장문에 따르면 그렇다. "노동조합법 개정안 2조는 근로계약 여부와 무관하게 사용자 범위를 확대해 법적 책임의 범위를 추상적으로 넓"힌다. 그 결과는 자명하다. "기업인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만들고 경영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 현재 철수했지만, 가령 프랑스계 마트 체인인 까르푸에서 산재가 벌어질 경우, 프랑스 까르푸 본사가 '원청'이 되어 형사 책임을 추궁당하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노란봉투법의 처벌 만능주의는 단지 산재 상황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노동조합의 교섭을 거부할 때에도 형사처벌 위험이 따른다. 문제는 '원청'의 범위가 불분명하고 한없이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 코스트코 미국 본사를 상대로 한국에서 노조를 만들고 협상을 요구하면 미국 본사에서 응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런 조건에서 장사를 할 외국 자본은 많지 않다. 물론 당장 모든 기업이 짐을 싸들고 한국을 떠나지는 않더라도, 한국 내 투자와 기업 운영에 있어서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다. 투자가 줄어들면 기업이 줄어들고 경제 활기가 줄어든다. 이런 법을 강행하면서 어떻게 코스피 5000을 달성하겠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다.
산업재해를 줄이자, 노동자의 정당한 권익을 보호하자, 이런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노란봉투법과 그 전에 시행중인 중대재해처벌법은 비판의 여지가 크다. 노동법의 관점이 아니라 법 일반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도 그렇다.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정부가 추진중인 이러한 입법은, 말하자면 '엄벌주의'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잘못된 발상을 깔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18세기로 돌아가 보자. 이탈리아의 법학자 체사레 베카리아(Ceasre Beccaria)는 1764년 출간된 '범죄와 형벌'(Dei delitti e delle pene)에서 흥미로운 사고 실험을 제안했다. 만약 강간범을 사형에 처하는 나라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강간은 줄어들까, 늘어날까? 강간범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강간이 줄어들 것이라 주장할 것이다. 엄한 처벌을 피하기 위해 결국 범죄 자체를 저지르지 않는 길을 택할 것이라는 논리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강간이 줄어들고 말고를 떠나서, 강간범은 체포되지 않기 위해 살인을 저지를 유인 동기가 생긴다. 살인을 저질러도 사형을 당할 것은 분명하므로, 강간범으로서는 '증인'이기도 할 피해자를 살려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입막음을 가장 확실히 하는 방법은 살인을 저지르는 것인데, 이미 강간죄 자체의 형량이 사형이라면, 살인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다.
형벌의 목적은 범죄에 대한 응징이 아니다. 범죄자가 추가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유사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예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턱대고 높은 형량을 정하고 처벌하는 것은 의미가 없거나 오히려 해롭다. 베카리아의 말에 따르면, "형벌이 잔혹해질수록 범죄자는 그 처벌을 피하기 위해 더 큰 위험을 무릅쓰게 된다."
혹형주의, 엄벌주의가 범죄를 예방하거나 줄이기는 커녕 더 큰 피해를 낳을 수도 있다는 이 강력한 주장은 우리가 아는 근대 형법 체계의 기본 정신 중 하나가 되었다. 처벌은 그 잘못에 따라 비례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범죄를 억제하기 위한 목적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쁜 놈을 혼내준다', '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자들에게 복수한다' 같은 사고방식은 세상을 더욱 나쁜 곳으로 만들 뿐이다.
18세기에 분명히 밝혀진 이 단순한 진리가 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무시되고 있는 것일까. 시행 3년차에 접어든 중대재해처벌법이 기대만큼의 효과를 가져오고 있지 못하다는 반론이 많다. 지난 18일 중앙일보가 국민의힘 김소희 의원실의 자료를 통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중대재해는 같은 사업장에서 계속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 동일한 원청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한 재발 비율은 9.24%에 달한다. 50인 이상, 혹은 공사금액 50억원 이상 건설업에서는 재발율이 27.9%나 된다. '강력한 처벌'로 해결되지 않는 어떤 원인이 있다는 소리다.
이런 상황에서 무턱대고 "너 말고 진짜 사장 나와, 처벌하겠어!"라는 방향의 입법을 강화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미국과 유럽에서도 떠올리지 않는 발상을 법으로 만들고 강행하는 것은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기업의 일자리 창출을 가로막으며, 결국 국민 경제 전체를 도탄에 빠뜨릴 수 있다.
실제로 그러한 방식의 입법이 이루어진다고 해보자. 외국 기업은 한국에서 기업을 할 의지를 잃는다. 한국인 또한 한국에서 기업할 의지를 잃겠지만, 태어나고 자란 나라니 외국인보다는 그래도 한국에서 기업을 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형사 처벌을 받고 싶지 않다. 감옥에 가고 싶지 않다. 그러니 처벌을 피하기 위해 온갖 꼼수가 난무하게 된다. 그런 불필요한 과정은 모두 추가적인 비용이다. 노동자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 '오너'의 법적 책임을 피하기 위한 용도로 전용됨으로써, 결국 노동자의 안전은 더 위험해진다.
애초에 그런 엄벌주의를 실천할 수조차 없다. 지난 19일 경상북도 청도에서 코레일과 하청 노동자 7명이 열차에 치여 2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중상을 입은 사건만 해도 그렇다. 중대재해처벌법을 따르면 코레일은 '영업정지'나 '면허 취소'의 대상이다. 지금 당장 기차를 멈춰야 하고, 코레일은 면허 취소를 당해야 한다. KTX건 무궁화호건 다 멈춰서야 한다는 이야기다. 엄벌주의, 혹형주의, 처벌 만능주의가 얼마나 허망한지 보여주는 안타까운 사례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산재를 줄일 수 있을까? 필자 같은 책상물림이 '이것이 답이다'라고 함부로 말할 수야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 구체적인 해답은 현장에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국책사업 중 하나였던 인천국제공항 건설 당시, 지금보다 더 열악한 여건과 안전 의식으로 인한 산재가 예상됐다. 당시 정부는 한 가지 기발한 해법을 내놓았다. 공사에 참여하는 30~40여 건설사들의 깃발을 나란히 게양해놓게 한 후, 산재가 발생한 기업의 깃발을 한 달간 한 칸 내려서 '조기'로 계양하게 한 것이다.
이 간단한 해법이 큰 효과를 불러왔다. 산재 발생 여부가 건설사들 사이의 '명예' 문제가 되면서, 건설사들 스스로 산재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현장 인력의 동류 의식이 끈끈하며, 팀워크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설 현장의 특수성이 십분 반영된 탁월한 해법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방법이 오늘날 모든 곳에서 통용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산업 현장에는 나름의 현실이 있고, 그 현실에 맞는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지루하고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왜 정부와 여당, 대통령실은 입을 모아 노란봉투법만이 해답이라고 주장하고 있을까. '세계적인 기준에 맞춰야 한다'면서, 미국도 유럽도 하지 않는 법을 한국에 만들려 하는 이유가 뭘까. 아직 시간이 있다. 노란봉투법, 특히 제2조는, 여기서 멈춰야 한다.
필자 노정태는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이다. '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을 역임했다. 현재 중앙일보, 서울신문, 신동아에 칼럼을 기고한다. '프리랜서', '불량 정치' 등을 썼으며,'아웃라이어',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칩 워' 등의 번역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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