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어머니에게서 배운 요리와 혼자 남은 저녁
마음에 남는 일 없이 먹먹한 수조 안에서 버틴 하루의 끝.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 문을 연다. 굴이 든 봉지를 꺼내 스텐 그릇 위에 쏟는다. 멀리서 도착한 바다 덩어리가 촤르륵 소리를 낸다.
굵은 소금을 크게 한 수저 넣고 굴의 연한 속살을 빠득빠득 씻는다. 내가 만족할 만큼 깨끗해질 때까지 검은 침전물을 버리기를 반복한다. 뽀얗게 씻긴 굴을 체에 받쳐두고 반으로 나눈다. 반으로는 굴전을 부치고, 남은 반으로는 굴국을 끓일 것이다.
계란 두 개를 깨 그릇 안에서 휘젓는다. 노른자가 풀어질 때까지. 밀가루를 대강 묻힌 굴을 계란물에 퐁당퐁당 빠뜨린다. 지글지글 소리를 내는 기름 위에 굴을 여러 알 한꺼번에 올린다. 엉덩이가 단단해질 무렵 나무젓가락으로 뒤집는다.
여러 절차가 있는 요리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어느새 굴전을 만드는 데는 능숙해졌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시댁을 드나들며 부엌일을 어깨너머로 배운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 음식에 정성과 기름을 아낌없이 쓰는 건 시댁의 방식이었다. 나는 이별한 시어머니에게 음식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키친타월을 받친 접시 위에 굴전이 수북이 쌓인다. 그 옆에서는 무와 멸치를 넣은 육수가 끓고 있다. 남은 굴을 그 안으로 밀어 넣고 액젓으로 살짝 간을 한다. 부추를 한 움큼 넣고 뚜껑을 덮는다. 원재료의 맛을 담백하게 살리는 건 우리 본가의 방법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맛은 언제나 나를 안정시켰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도무지 조화할 수 없다고 좌절했지만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세계와 혼인이라는 형식으로 충돌했다. 그 과정에서 어떤 파편은 나를 파괴했고, 또 어떤 파편은 내 세계에 편입되었다. 내 세계는 그렇게 섞인 모습으로 계속되고 있다.
오늘은 굴전과 굴국밥을 오로지 나, 한 사람을 위해 차렸다. 동그란 식탁에 음식을 가득 올려놓고 사진을 찍어 가족 카톡방에 올렸다.
“너무 잘 살고 있죠?”
“응.”
엄마와 쌍둥이 동생들의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 감정적으로 응원하지 않고 실용적으로 반응하는 것, 그것 또한 우리 집의 방식이었다.
굴전을 간장에 찍어 먹고 밥을 한 숟갈 뜬다. 곧바로 국물을 들이켜 속을 덥힌다. 나를 안아줄 사람도, 온기를 불어넣어 줄 사람도 없다. 그래서 나는 튀김옷을 입히고 국을 끓이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오가며 내 욕구를 스스로 충족시키려 애쓰는 사람.
신선한 단백질을 섭취했다. 무척 만족스러웠다. 자리에서 일어나 설거지를 시작한다. 예전보다 내가 더 복잡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다. 어쩌면 나를 예전보다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
혼자 먹는 저녁이 편하면서도, 맥주잔을 부딪히는 술자리가 그립다. 공상을 좋아하면서도 감각하는 삶을 놓치고 싶지 않다. 울면서도 해결책을 찾고 싶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 안심하면서도 하루는 느낌대로 흘려보내고 싶다. 가부장제 아래에서는 눌리고, 혼자 있으면 고독해진다. 친구의 애정이 고프면서도 어떤 연대 앞에서는 차가워진다. 이런 나는 과연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을까.
내가 선택한 보금자리에 고립된 채로 세계는 흘러간다. 도시의 불빛 아래 서성이는 연인들, 쇼핑몰에 앉아 마시는 아메리카노, 맥주잔을 맞대는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상처가 보인다면 나는 들춰보고 싶다. 새살이 얼마나 돋았는지 확인하고 싶다. 다시 세계와 연결돼도 괜찮을까. 또 울지도, 또 지칠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인간이라는 종 자체를 미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굴로 만들 수 있는 요리는 생각보다 많다.
나는 아직, 그다음 요리를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