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끄적이기

공의존

by Hi my name is

공의존이라는 개념은 처음 알코올 중독 환자와 그를 돌보는 도우미 사이에 생긴 개념이라고 한다.

이 개념은 위와 같은 상황에서 환자가 도우미에게 의존하는 것뿐만 아니라, 도우미도 환자를 도우면서 환자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 때문에 환자를 필요로 하면서 환자가 완치되는 것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더디게 한다-는 생각에서 시작됐다고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학문적으로 확인한 사실은 아니니, 참고로만 알고 있길!)


객관적으로 보면 공의존은 그 관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위험할 수 있는, 건강하지 않은 관계이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공의존(나를 필요로 하는 이를 필요로 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와 필요에서 발현하는 관계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무리를 이루어 살아가는데, 이 이유에 대해 나는 사회의 가장 큰 역할인 분업(다양한 역할)만이 아니라고 믿는다. 사실 살아남기 위한 분업이라면 사회는 이렇게 커다란 형태를 취할 필요가 없으며, 끊임없이 발전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왜 나는 ‘필요’에 집착하며 이를 나의 존재의 이유이자 족쇄라고 말할까?

내 고민의 결과는 이러하다. 사회가 거대해지면서 이전에는 대가족이 하던 기능 (가족의 일원으로 그 안에 수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서로 보호하는 기능)을 대체했다. 예를 들어,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농사를 짓지 않아도 쌀을 구매할 수 있으며, 옷을 짓지 않아도 옷을 살 수 있고, 의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높은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사회, 정부는 사람들이 이런 서비스를 구매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화폐를 만들고 가격을 관리/통제하며, 그 대가로 세금을 걷고, 또 이 세금을 사회의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한다.


자식들은 부모가 병들고 늙어도 부모에게 자신의 삶을 100% 투자하지 않는 대신에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말로만 보면 얼마나 완벽한 세상인가?

하지만, 여기에 바로 현대인의 외로움이 있다. 바로 나의 ‘필요’를 비교도 되지 않게 큰 무리에서 증명해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돈을 벌 수도 없고, 앞서 말한 혜택들을 누릴 수도 없다.


대가족이 하나의 사회를 이룬다고 하면, 내가 농사를 짓는데 소질이 없어도 농사를 지을 이가 나 하나라면 나는 이 가족에서 추방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는 내가 농사를 짓고 있는데 수확물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고객들을 잃고 만다.


경제적 관점이 아닌 조금 더 emotional 관점에서 봐도 이 논리는 동일하다고 본다. 현대인들은 가족이 아닌 곳에서도 가까운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 친구에게는 말할 수 있지만 가족에게는 말할 수 없는 것. 모두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와 동시에 이 인간관계가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는 일이 잦아졌다. 다른 도시로, 혹은 다른 나라로 이사를 가기도 하고 감정이 틀어져 멀어지기도 한다.

이 관계의 두꺼움과 단단함이, 분산되고 어질러져 많은 얇고 약한 관계를 만들었다.


이런 각박한(?) 사회에서 내가 의지할 사람을 찾는 것 고 갈망하는 것은 내 관점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한, 약점을 쉽게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기에, 내가 의지할 사람이 단순히 내가 동경하는 강한 사람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한 사람을 나 또한 필요로 하게 되는 것도 자연스럽게 보인다.


정리해 보면, 현대 사회는 나를 끊임없이 증명해 내도록 강요하기 때문에, 나는 빈틈을 쉽게 보일 수 없다. 그런데 자신의 빈틈을 보여주며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만으로 의지하게 될 수 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나를 찌를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우스운 점은, 사회는 나에게 나를 증명하도록 강제하지 않았다. 내 목에 칼을 들이민 것도 아니고 내게 소중한 이를 해치겠다고 협박한 것도 아니다.

이 또한 소수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 나는 거기에 보기 좋게 걸려든 망상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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