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 있을 때는 한 번도 그려보리라 마음먹지 않았던 한국화를 이국땅에서 처음으로 그려보았다. 전문적인 한국화와는 거리가 먼, 흉내만 내 본 그림이지만 헝가리 사람들과 함께 한국화를 배우고 그리는 시간은 새롭고 유쾌했다.
화선지가 아닌 캔버스에 먹과 수채 물감이 아닌 아크릴 물감으로 그리는 한국화라니!
하얀 캔버스에 바탕에 될 갈색과 노란색을 섞어 아래로 갈수록 점점 진해지도록 그러데이션을 넣는다. 빽붓을 이용해 여러 번 색을 먹여야 배경에 캔버스 구멍이 드러나지 않고 위에 입혀질 색이 선명해진다. 배경이 완성되면 모작을 위한 그림을 보며 연필로 밑그림을 그려준다. 하얀 잎 끝에 분홍 꽃물을 들인 연꽃과 연잎, 그 아래 학 한 마리. 심플한 그림이다. 한국 문화원 수업이라 8명의 헝가리인과 나를 포함한 2명의 한국인 수강생이 참여해서 몇 주간 그림을 그렸다. 모작할 그림은 선생님이 가지고 오신 10가지 그림 중 선택하는 것인데, 헝가리 사람들에게 순서를 양보하고 나니 남은 것은 꽃과 새가 있는 그림 '화조도'.
아크릴 물감이라 물 조절을 통해 맑고 투명한 색감을 표현하는 한국화의 장점을 살리기 어려우니 겹겹이 칠해서 농도를 최대한 다르게 표현해 보라는 선생님의 요구에 따라 연잎 하나를 칠하기 위해 색을 얼마나 여러 번 입히고 또 입혔는지 매주 가서 그림을 그리는데 뭔가 진전이 없는 느낌이 들어 맥빠질 때도 있었지만, 결국 그림은 완성이 되었다.
한국에 돌아오기 전 헝가리 주인 할머니께 선물한 헝가리식 한국화.
다음 주부터 아이들과 한국화 수업을 시작한다. 미술 수업을 준비하면서 먹과 화선지를 주문하다 구글 포토가 뜬금없이 보내준 옛 사진에 지난 추억을 되새겨 본다.
난 사실 서양화보다는 한국화와 더 친하다. 첫 발령지인 이천에서 2년간 서예를 배우고, 난을 치고, 선생님들과 자그맣게 서예 작품 전시회를 했었다. 그때 내 호는 청란, 맑은 난초다.
스승님은 송민 이주형 서예가.
유퀴즈에 나왔던 여성 서예가 이정화 님의 아버지 시다. 허준 드라마에서 허준이 글 쓰는 장면에 대필을 하시고, 여러 사극의 타이틀을 쓰신 유명한 분이셨다. 서예를 정말 사랑하셔서 매일 숙제로 20장씩 써오라고 하셨던 것도 기억이 난다. 오실 때마다 100장 200장씩 연습했는지 검사하시고, 숙제를 안 해오면 불같이 화를 내셨던 탓에 20년이 지난 지금도 붓을 잡으면 '중봉'이 절로 된다. 연습과 습관의 힘은 무섭다.
인터넷으로 면천 캔버스 몇 개를 주문했다. 그림이 그리고 싶은 가을이다. 이상하게 여유가 없고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틈틈이 이 가을을 그려보고 싶다. 가을의 나무, 하늘이 담아내는 아름다운 색을 캔버스에 담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