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이 한글날이니 일박 이 일 여행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난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남편은 몇 시간 동안 내 처분만을 기다리는 눈치다.
"근데 당신 여행 장소는 어디로 갈지 생각해 놓은 데는 있어?"
내가 물었더니 남편왈
"즉흥 여행이니까 생각해 놓은 데는 없지. 당신이 평소에 가보고 싶은데로 정해."
그럼 그렇지. 역시 즉흥적인 남편의 성격답다.
근데 내가 평소에 어디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도 않았고 남편은 늘 일에 치여서여행 같은 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 여행지를 정하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둘이 부산으로 대전으로 딸아이들을 만나러 다녀온 적은 있지만 말이다.
몇 주 전친구랑 둘이서 여행을 갔다 온 적은 있다. 그때도 홀가분하게 여행을 즐기지는 못했다.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이 썩 즐거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남편도 직장에서 팀원들과 며칠 동안 출장을 다녀오기는 했지만 나와의 여행은 신혼여행 빼고는 없었다.
그런데소리 없는 파도가 해변의 모래를 적시는 것처럼가고 싶지 않은 여러 가지 이유들이 고이 접어진다. 이것저것 따지거나 귀찮은 마음을 가슴 밑바닥 창고로 들여놓고 이 이상한 일을 해보기로 한다. 아무래도 내 갱년기와 남편의 변덕이 손바닥처럼 마주친 시기라고생각하기로 했다.한 사람의 갱년기와 또 한 사람의 변덕이 이럴 때는 죽이 척척 맞아 재미있는 시너지를 낼 것만 같으니까.
일단은 내가 구독하고 있는 브런치 작가님의 여행기를 뒤져보다가 최근 연천에 있는 댑싸리 공원 사진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점찍었다. 그다음엔 블로그 이웃의 글에서 읽었던 파주 헤이리 마을이 떠올라서 그걸 두 번째로 정했다. 휘뚜루마뚜루 정해진 이 여행이 살짝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냥 저질러 버리기로 했다. 아들에게도 귀띔하지 않고 그냥 무작정 떠났다. 가서 별로면 그날로 바로 집으로 돌아오기로 하고 말이다.
매사에 뜨악한 남편이 유일하게관심 있는건 수년 째빠져있는 골프뿐이고 손주들하고도 놀아주는 법 없이 자신의 즐거움이 일 순위였다. 그래서 딸들과 나는 암암리에 그를 '철없는 금쪽이 아빠'로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의 반전이 있었다.
여행을 하면서는 나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여주기도 하고 딴에는 에스코트도 해가며 여기저기 포즈를 취해보라며 사진도 찍어주는 것이 아닌가.
우리 둘만 전세 낸 것처럼 한갓지던 전시장에서 고흐의 그림을 둘러보던 진지한 남편의 모습. 고흐와 태오의 편지를 자세히 읽으며 그림에 감탄을 하는 그의 모습이 새롭기도 했다. 속으로 어쭈! 하는 생각에 딸들과의 단톡방에 사진을 올렸다.
큰딸은 아빠가 웬일이래? 하고 답장을 했고 저녁에 퇴근한 둘째는 나와의 통화에서 금쪽이 아빠가 철드셨네 하며 놀라워했다. 그런 딸들의 반응을 남편에게 전하며 슬그머니 이번 여행을 제안한 이유를 물었더니 그냥 내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나?
다른 사람들처럼 중년부부가 다정하게 손잡고 여행 다니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고 한다. 같이 다니면서 예전 생각도 나고 나와 보조를 맞추는 게 의외로 즐거웠다고도 했다. 나도 속으로는 적응이 안 돼서 뻘쭘하고 있었지만 남편의 진심을 들으니 그게 입에 발린 소리는 아니라는 게 느껴진다. 그냥 지금의 그의 진심을 그대로 받아주자는 마음이 들었다.
오랜만에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속으로는 우리 제법 친해졌네 하는 마음이 들어 혼자 픽 웃고 말았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하루의 생존신고만 겨우 하고 나는 내 일과 취미로, 그는 그의 일과 취미의 자리로 돌아가더라도 말이다.
지금 그의 마음을 담백하게 기뻐하는 것.
그게 금쪽이 아빠의 개과천선에 풍악을 울리는 일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자꾸 잘한다 잘한다 하면 풍악소리를 계속 울려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