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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리소 Jun 12. 2023

잘 익어가는 연습

다 늙은 동생 결혼식 혼주 체험기

냉동실에서 꺼내놓은 전복이 마침 알맞게 해동됐다. 깨끗이 씻어 손질해 놓고 팔팔 끓어 거의 다 퍼진 죽 냄비에 잘게 썰어 넣는다. 조용히 가라앉은 주방에 휴대폰을 눌러 음악을 부른다. 

음악은 국내 아이돌 노래. 

죽 냄비의 열기로 공기마저 눅진하게 가라앉아 있었는데 그들의 음악이 성큼성큼 들어와 롤리팝처럼 싱싱하고 생생하게 주변을 터뜨린다. 






동생이 늦은 나이에 결혼식을 했다.

늦은 나이가 다 뭔가.

내 딸이 낳은 아이들이 있으니 이제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현실이다. 그런데도 그 자리는 세상의 잣대가 필요 없는 상큼한 시작의 자리였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늦게 만나서 늦게 사랑한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가족이 되는 게 언뜻 가슴 언저리가 간질거리지만 그래도 축복 터지는 일이다. 게다가 나와 남편이 혼주의 자리에 있어줘야 한단다. 처음엔 좀 어색해서 거절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안 계시니 누나가 이어받는 게 자연스러운 순서다. 가슴 한구석에는 자식의 좋은 일에 부모님보다도 더 진하고 강력하게 축복해 주실 분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 돌아가신 부모님이 아쉽고 안 계시니 허전한 마음이 다.


결혼식 당일이다.


동생도 새 올케도 둘 다 나이 지긋한 혼사라 대체로 조촐한 하객 수준이었고 그래서 북새통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러나 역시 결혼식이라는 드라마는 시끌벅적이 진리인지 우리 모두는 사진과 헤어와 메이크업의 갖은 연출에 더해 주연과 조연의 강력한 연기력이 필요했던 결혼 드라마를 무사히 치러냈다.

한바탕의 컷! 과 액션! 이 난무하는 현장에 백미는 따로 있었다.


귀를 알엔비로 간지럽히는 축가도 끝나가고 신부의 친구들이 줄줄이 신부에게 장미 한 송이씩 건네더니 축가를 부르던 가수가 넌지시 신랑에게 꽃 한 송이를 내민다. 이때까지도 뭐지? 싶었는데...

 

두둥!



무뚝뚝 데면데면 캐릭터의 오리지널 버전인 남동생이 제 신부에게  꽃을 바친 뒤 자기가 쓴 게 분명한 축시를 낭독하는 게 아닌가! 

 장면은 현실 가족인 내가 관람하기에도 참으로 어색하고 소름 돋는 연기였다. 어떻게 저런 재능을 지금까지 숨기고 살았을지 관객으로서는 심히 안타까웠던, 아카데미상 후보 저리 가라 할 연기였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그러므로 더욱 그의 진심에 그 노력에 뭉클했다. 새 올케는 울었고 그녀의 친구들도 울었다. 이 감동의 드라마가 그들의 일상에서도 모히또 잔의 소금과 설탕처럼 입술 끝에 매달려 있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감상평이 안에서 차올랐다.


사 시간에는 음식이 입인지 코인지 모르는 곳에서 머무르는가 싶더니 인사 지옥에 빠졌다가 겨우 나와 탈진한 오후처럼 장렬히 막을 내렸다. 저녁에 걸려 온 전화 통화에서 둘째 올케는 자기가 뭘 했다고 집에 가서 죽은 듯이 뻗어 낮잠을 늘어지게 잤는지 모르겠다며 웃는다. 나름대로 우리 삼 남매 가족들도 그의 혼사 드라마가 긴장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이제 혼주 체험은 내 아이들에게만 허락하고 싶다.

다 늙은, 아니 함께 늙어가는 동생에게 말고.

내게는 다소 무거운 자리였는데 동생에게는 병풍 같은 자리였을까.

뭔가 넓게 두르고 앉아 있어야 할 자리, 혼주석은 그런 자리.

속은 아직 부모님만큼의 어른이 아니지만 어른의 자리에 앉았으니 마땅히 어른 노릇을 해야 하는 것처럼.

거긴 그런 자리다. 

불그죽죽 덜 여문 석류알 같은 내 속을 잘 아무려 덮어놓고 아주 담백한 어른으로 앉는 자리. 내 안의 나는 무수한 세계를 낳고 안에서 설익어 터져도 그 다채로움을 드러내서도 드러낼 수도 없는 곳.

조용한 배경이 되어가는 곳.

어제의 어설픈 나를 다독여 누군가를 성숙하게 떠나보내고 조금씩 잊어주는 곳.


그래야만 하는 곳이다.




언제부터 내가 이 자리에 안착하게 된 것일까?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자리가 암암리에 천천히 마련되었다는 지나간 예감. 시간이 마련해 둔 덜그럭거림을 헤쳐오는 도중에 시나브로 배경이 되고 울타리가 되고 더위와 눈비를 막아주는 우산으로 마련되고 있었나. 

아버지와 엄마가 우리의 울타리고 우산이었는데 이젠 나와 늙어버린 동생들이 또 누군가의 울타리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사실 딱 까놓고 말하면 아이들이 점점 우리의 우산이 되어가는 도중에 우리 자신은 그들의 심장 속에 심어져 작은 씨앗으로 발아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또 누군가의 우산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죽을 끓이는 전체 시간을 42분에 맞춰놓았었다. 다시 타이머를 돌려 10분 더 늘려놓는다. 좀 더 익히면 부드러운 죽이 되겠지. 쌀 심을 모두 익혀야 부드럽게 넘어가 영양분이 되겠지.

생의 굽이굽이 구부러진 속에서도 등을 쓸어주는 온기가 되도록 그렇게.





* 대문 사진은 새 올케를 중심으로 왼쪽부터 우리 둘째 딸, 그 아래 첫째 손자, 둘째 손자, 첫째 딸, 막내 남동생의 둘째 딸, 첫째 딸, 제 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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