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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리소 Aug 10. 2023

다르다는 진리에 관하여

'다르다'속에 알알이 들어있는 다름의 맛


큰손자가 찍은 엄마와 동생사진



부산의 딸이 아이들 방학을 맞아 우리 집에 다니러 온 지 4일이 되었다. 총일정은 8박 9일. 처음 방문 통보를 받았을 땐 으앗! 왜케 길어? 본심이 막 그냥 나왔다.

이번 방문이 길어진 데는 두 손자와의 방학을 감당하기 버거운 딸이 나와 짐을 나눠지려는 속셈이 진하게 깔려있다. 속셈이야 어찌 됐든 자녀가 부모를 방문하는 건 '피곤과 찰나의 기쁨'따라오는 이벤트다. 


여러 번의 상차림과 기존보다 두 배 늘어난 빨래가 내 일상에 삽입되었고 중간중간 티타임처럼 딸과의 수다가 첨가되었다. 아이들과의 대화는 항상 즐겁지만 그 속에서 나는 다른 세계를 여는 신기함을 맛보곤 한다.


진짜 다르다!


'다르다'라는 말속에는 아직 쑥 내밀만큼 구체적이고 선명한 정체성이 만들어지지 않은 많은 상념과 개념들이 들어있다.

다르다의 사전적 의미에서는  '예사롭지 않다'가 눈에 띈다. 역시 예사롭지 않은 녀석이었다.

'흔히 있을만하지 않'은 것에 그치지 않고 얼마나 견고하고 고집스럽게 나를 구축해 여미고 있었는지 '다른'안에는 약간의 고통도 깃들어 있는 듯하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나와 다르다는 사실에 조금치의 가시 같은 찌름과, 다른 것을 수용해야 하는 숙명이 함께 있었으니까.

큰딸과 나는 mbti조차 겹치는 게 없다. 난 infj이고 딸은 estp.

어디서부터 아귀를 잡아 요철 같은 우리를 조화롭게 해야 할지 어수선했다.


달라서 당황스러웠고(딸의 유년기), 달라서 힘들었고(딸의 사춘기), 달라서 신기하고(20대의 딸), 달라서 사랑스럽다(비로소 지금에 이른)

그 안에는 생의 분기마다 달라지는 내가 있었다.





달라진다는 건 발전이나 퇴보라는 수직적 이동보다는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과하는 햇살의 조각 같은 빛의 띠, 곧 스펙트럼이다.


첫째 딸에게서 투과되는 스펙트럼은 발랄과 호기심, 털털과 떠들썩함이다. 본인은 별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 여기면서 물어봤더니 쿨하게 인정한다.


둘째 딸의 그것은 진중함, 깊디깊은 속셈, 박애주의, 걱정인형이다. 이 점을 큰딸과 나누었더니 두 팔 들고 침 튀기며 공감했다. 둘째가 빠진 우리 둘의 공감에 대해선 비밀이다. 사실 둘째가 다 아는 비밀이긴 하지만.


게다가 아직 뭐라 이름 짓지 못하는 '다름'의 결정체 셋째가 남았다(그렇습니다. 전 세 아이의 엄마예요)

지금까지 키워본 17세 아들의 콘셉트는 '유리내면'이면서 미래의 '깨발랄 유튜버'(이 점은 큰누나의 유전자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됨)다.

또 하나는 '놀림버튼'.


누군가 관심이 생기면 자세히 보아야 하고 찬찬히 관찰야 한다. 오래오래 예쁘게 바라봐 놓고는 결국 놀림으로 자기의 사랑과 관심을 표현한다. 그걸 보면 아들은 빼박 '청소년'이다(내 청소년 때 마음 밑바닥도 언제나 비뚤어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들은 섬세한 손가락으로 그림도 잘 그리고, 심지어 노래도 잘하는데(누나들은 인정 안 함) 도통 성적표에선 탄탄한 섬세함을 찾을 수 없다. 음악, 체육이 만점이고 그  외에는 모두 다 듬성듬성하기가 안드로메다급이다. 그래서 난 아들의 스펙트럼을 성적에서 찾지 않기로 했다.

우리의 사명은 '보드라운 관계' 뿐이다.


아들 입장에선 집안에 '다름' 결정체가 자기 말고 둘이다. 가끔 아빠와 엄마를 틀딱이라고 소심하게 놀리고 우리와 자기를 다른 선상에 둔다. 아들의 표현대로라면 아빠는 일과 골프에 중독된 할 중년(할아버지+중년)이고, 엄마는 압축해서 작게 만들어 주머니에 넣어갖고 다니고픈 통통 빅맘이란다.


맙소사!


심지어 옷이나 신발을 살 때도 누나들의 권유만 접수한다. 둘째 누나가 사준 나이* 반바지가 하나밖에 없어선지 마르고 닳도록 입고 다녀서 몇 개 더 사주려고 색이랑 바지 길이를 물었더니 정중히 사양한다. 티도 바지도 누나들이 결제하게 하고 누나들이 골라준 렌즈만 접수한다(여기까지 쓰고 보니 울 아들 큰 그림이 보인다. 엄마아빠 지갑을 지키려고 그런 거니? 어쨌든 땡큐!)

아들은 자기가 맛있다고 광분하는 음식에 대해서 왜 엄마와 아빠는 전혀 맛있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의아해한다. 우리의 대화는 우회하지 않는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에서 화살이 바로 내려 꽂히듯 직선이다. 서로 배려하지 않는다. 그냥 내 생각을 다이렉트로 꽂는다. 입맛이나 생각, 어떤 물건에 관한 취향까지도.


한 두 달 전까지는 친구나 동네 형들의 연애와 이별 이야기도 내게 와서 콩콩콩 털어놓더니 이젠 형들과의 카페미팅 후기도 함구한다. 달라진 아들의 태도 성장이라 생각하니 귀엽기만 하다.

이렇게 아들은 가족 안에서 조금씩 '다름'이라는 분위기를 배워가고 있다.





어떤 날은 늙수룩한 엄마가 초록 선인장을 그려 갖고 와서는 멋지지 않으냐고, 네 보기엔 어떠냐고, 맡겨놓은 선물보따리를 어서 내놓으라는 듯이 재차 그림에 대한 평(그것도 긍정적적으로다가)을 해달라고 다그치기도 한다. 그에 대한 단호한 아들의 대답.


뚱뚱한 오이 같아!


원하던 대답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들의 평이니 오이처럼 싱그럽게 받는다.


우리 집 거실 화장실에 환풍기가 없다며, 왜 다른 집에 있는 게 우리 집엔 없는 거냐며 깽깽 댄다. 또 트집 시작했구나 싶어 멀뚱히 쳐다보니 어서 공감하란다.

"오~맞아! 다른 집에는 있는데 우린 없지~그렇네."

이렇게 공감 맨트까지 친절히 알려주면서.


다름에서 매일 배운다.

이런 개딸들과 개아들(개를 폄하하는 게 아니라 버거울 정도로 개성이 강하다는 접두사다) 이 내게 없었다면 배우지 못했을 진리를 이들에게 배운다.

이들에게서 나 자신으로만 앞뒤로 꽉꽉 막힌 내가 '나'라는 세계를 깨고 '너'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겐 아이들이 스승이다. 

선생님들이 이젠 좀 스스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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