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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리소 Oct 12. 2023

하루의 얼굴

시간과 강연 사이

오늘은 아주 오랜 시간 밖에 있어야 할 날입니다.

제 퇴근 시간은 3시경인데 약속된 강연을 듣는 시간은 7시이기 때문입니다.

근무하는 곳에서 집까지는 열일곱 정거장이고 정류장에 내려서도 10분 정도를 걸어 올라가야만 집에 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집에 들렀다 가기에는 피로도가 꽤 짙어지게 됩니다.

지금의 제 컨디션으로서는 무리일 것 같습니다. 어제부터 장염약을 먹고 있기 때문에 몸의 상태도 살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까운 도서관으로 갑니다. 시간을 맘껏 쓸 수 있는 장소로 그곳이 최적이니까요.


근데... 이런!

신호가 오는군요.

역시 도서관은 제 변비탈출 장소로 최적입니다.

급히 화장실을 찾은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키가 껑충하니 크고 마른 60대 정도의 남성이 여자화장실 안쪽에 서서 당당하게 통화를 하고 있지 뭡니까.

저는 다시 한번 화장실 표시를 확인하고 그분에게 화장실 위치를 잘못 찾으셨다고 얘기하고 싶었으나 갑자기 급한 신호가 더 지는 것 같아 그냥 냅다 위층으로 뛰었답니다. 

급한 일을 해결하고 나니 만사가 여유롭군요.

이래서 늘 도서관이 제게는 놀이터고 쉼터고 화장실이고 그렇습니다.




7시 강연에는 한 스무 명 남짓 모인 것 같습니다.

제가 앞에 앉아 있으면서 내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뒤의 공기와 숨소리, 간간이 들려오는 인기척으로 인해 그렇게 어림합니다.


작은 강연장 안에서 저는 태지원 작가님의 그림 이야기에 훅 빨려 들어갑니다. 이미 그분의 책을 읽은 독자로서 책 내용을 알고 있지만 육성으로 팍팍 데리고 다니는 패기에는 또 다른 맛이 있더라고요.

작고 마른 체구인 작가님의 목소리엔 힘이 넘치는 소년의 그것처럼 역동적인 질주가 배어 있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사람들은 돌아갑니다. 한 시간 남짓 작가님의 이야기에 손 잡혀 다니다가 실제로 손을 맞잡았습니다.

작가님도 반가운지 금세 저를 알아보시네요.

정말 잘 들었지만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저는 어버버 하다가 꾸벅으로 마무리합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작별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탑니다. 돌아오는 긴 길에 뱃속이 부글거렸지만 강연의 잔상을 떠올리느라 조용히 그 시간을 참습니다.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

나를 이해하는 방법,

있는 그대로 자신의 쇠락함을 받아들이는 태도,

모든 사람은 자신의 짐을 짊어진 채 오래 달리기 중이라는 사실,

새로운 해체는 새로운 시작의 다른 이름임을 깨닫는 것.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의 삶에 대해 풀어내신 작가님의 이야기가 좋은 선생님의 따뜻한 지시봉처럼 오래 남습니다. 


저는 이렇게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였는데 새로운 내일은 또 어떤 얼굴을 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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