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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리소 Oct 17. 2023

미역국

이렇게 오래 먹게 될 줄 몰랐습니다.

전 입이 짧은 사람이거든요. 이 말을 하면 상대방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저를 훑어보기도 합니다. 입이 짧다는 말이 무색하게 푸근해 보인다는 뜻이겠죠?


미역국 이야기입니다. 우리 다섯 가족은 생일이 모두 겨울입니다. 저와 아들이 1월 같은 날 생일이고 남편은 저와 6일 차이가 납니다. 두 딸은 각각 1월, 2월이 생일이므로 무려 1월 생이 4명, 2월이 한 명이네요. 그런 이유로 미역국은 1월과 2월에 몰아 먹습니다. 그것도 물려서 나중에는 제 생일엔 미역국을 패스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3월부터 6월까지 미역국 구경을 못합니다. 곧이어 6월엔 큰손자 생일, 9월엔 작은 손자 생일이, 12월엔 사위 생일이 있어서 다시 미역국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젠 그 루틴이 깨지게 되었어요. 큰딸가족이 부산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6월, 9월 12월 미역국 루틴이 끊어졌습니다. 거리도 멀고 부산의 가족들 생일에 맞춰 방문하기가 어렵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3월부터 12월까지 미역국을 만나지 못하는 구간이 생겨버렸습니다. 뭐 그까짓 미역국이야 먹고 싶을 때 언제든지 끓여 먹으면 되지 않나 하시겠지만, 정말 그렇게 잘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오랜만에 미역을 불렸답니다.

근데 미역이란 건 다 불리고 나서실재적 존재감을 드러내는 식재료라는 것을 잠시 망각했습니다. 편식쟁이 아들은 안 먹을 테고 저와 남편 둘이 먹을 양으로는 무지하게 불어버렸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양 그대로 미역국을 끓였습니다. 정말 한 6인분이 되어버렸어요. 하루 먹고 놔두었지요.

참, 제가 입이 짧다는 말씀은 드렸지요? 한창때는 하루에 국이나 찌개를 연거푸 상에 올린 적이 없을 정도로 입도 짧고 손도 작아서 일 인분이나 이인분의 식사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식사 준비보다는 취미생활이나 멍 때리기, 독서 같은 걸 더 비중 있게 하다 보니 식사를 간소하게 하기 위해선 여러 끼를 만들어놔야 그 일들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습니다.


혼자 식사하더라도 전 식탁에 이것저것 차려놓고 먹는 걸 좋아라 했는데 이젠 책을 펴놓고 음악을 들으며 먹으려니 괜히 그렇게 식탁을 차리는 게 무척 귀찮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다시 미역국을 먹다니 정말 싫군, 했지만 미역국에 후루룩 하게 되었네요. 


게다가 독일에 사시는 유정 작가님 브런치를 읽다 보니 미역국 사진이 있어서 다시 제 입맛에 미역국 버튼이 눌러졌습니다. 지난여름에 한국에 방문하셨던 유정 작가님을 만났던 추억을 생각하며 또 미역국을 후루룩 먹었답니다.

아, 맛있다.




미역국 얘기를 하려니 눈물로 마시던 미역국 생각이 나네요.

둘째 아이를 낳던 날이었어요. 첫째를 낳을 때는 열 시간 동안 진통을 해서 둘째도 그만큼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각오하고 있었는데 웬걸? 다섯 시간 만에 둘째를 만났습니다.


퇴근하고 병원으로 온 남편은 제 집인 양 쿨쿨 코를 골며 잠들었어요. 이른 저녁을 먹은 저는 둘째가 빠져나간 속이 얼마나 허했는지 배가 너무 고팠답니다. 자는 남편을 깨워 배가 너무 고프다고 하니까 뭐라는 줄 아세요? 그냥 참고 푹 자면 눈 깜짝할 사이에 아침이 될 것이니 그때까지 자랍니다.

어휴. 지금 같으면 냅다 소리부터 지르겠지만 그때 전 아직은 순한 새댁이었지요. 자려고 누웠고 분명 많이 잤다고 생각했지만 눈을 떠보면 10분이 지나 있고 또 자다가 눈을 뜨면 30분이 지나있었습니다. 밤이 얼마나 길었는지 제 인생에서 가장 긴 밤이었어요.


겨우 동이 트려고 할 새벽, 저는 친정으로 전화를 했지요. 병원과 친정이 그리 멀지 않았거든요.

제 전화를 받은 엄마는 얼마나 배가 고팠겠냐면서 왜 미리 전화 안 했느냐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제가 전화를 한지 한 시간도 안돼서 엄마는 따뜻한 미역국과 몇 가지 반찬을 갖고 오셨습니다.


모락모락 뜨거운 김이 오르는 그것을 한술 뜨는데 울컥 눈물이 나왔습니다. 앞에 앉은 엄마가 볼까 봐 얼른 감추는 눈물과 국맛이 묘하게 간이 맞더라고요.

목을 미끄러져 넘어가는 부드러운 미역은 아이 낳느라 고생했다 제 맘을 위로하는 엄마의 진심이었고 실하게 씹히는 쇠고기는 그런 딸에게 힘을 주는 응원이네요. 입을 거쳐 밤새 광야처럼 허허로웠던 뱃속을 따끈하고 그득하게 채우는 건 바로 애정과 사랑이었습니다.


그날 엄마의 미역국은 제 영혼을 따끈하게 데워주었어요. 몸과 마음이 동시에 위로를 받은 것처럼 세상에 대한 다정한 시선을 갖게 했지요. 밤새 배고팠을 딸을 진심으로 공감하며 끓여다 주신 그 국은 그냥 미역국이 아니라 딸을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이 음식으로 녹아져 제 안에 머무른 겁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주무시다가 갑자기 받은 전화에 엄마는 당장 집에 미역이 없다는 걸 아시고 가족처럼 지내는 옆집 친구를 깨워 미역을 빌려서 국을 끓여 허둥지둥 병원으로 오셨던 겁니다. 역시 내 새끼를 가장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건 엄마밖에 없더군요.


이 얘기는 지금도 종종 남편의 무심함을 타박하는 에피소드로 사용합니다.

그럴 때마다 자동으로 떠오르는 눈물의 미역국은 단순한 국이 아니라 딸을 생각하는 엄마의 애정이고 응원이었음을 폐부에 새기게 되었고요. 


이처럼 미역국은 가장 흔한 음식이지만 제겐 가장 고향 같은 음식이네요. 이젠 부모님이 다 안 계셔서 엄마 음식을 먹을 기회는 없지만 엄마 사랑을 듬뿍 머금은 저는 지금도 통통하게 살이 오른 중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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