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배우는 시간>을 읽고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일어나는 최대의 사건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일생일대의 사건에 대해 새 자동차를 구입할 때보다도 준비를 덜 한다. 스스로 선택한 방식으로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하는 법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심지어 병원에서도 알려주지 않는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상태로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하는 현대 의료는 죽음에 대한 정의마저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사랑하는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하게 눈 감는 것을 최선으로 여기지만, 그런 행운은 극소수에게만 주어진다.
오랜 옛날부터 근과거까지도 사람들은 집에서 가족과 친지 등 가까운 사람들에 둘러싸여 임종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죽어가는 사람의 곁을 지키는 것은 더 이상 가족들이 아닌 약병과 의사뿐이지요. 죽음이 병원으로 떠넘겨진 다음 수순은 당연히 죽음이 치료해야 하는 질병으로 둔갑하는 거예요. 요즘은 한술 더 떠서 노화조차도 치료가 긴요한 병으로 치부되고 있지요.
연명의료 결정법에 사용된 용어들을 살펴보면 "임종 과정"을 마치 삶의 과정에서 뚝 떨어진, 바로 죽음을 예측할 수 있고 죽음이 임박했음을 쉽게 알 수 있는 시기로 보는 인식의 문제가 있다. 죽음을 삶의 일부분으로 끌어들여야 죽음을 극복할 수 있고 죽음이 삶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믿었던 김수영 같은 위대한 시인의 사상을 굳이 빌지 않더라도 죽음은 항상 누구에게나 (비교적) 공정하게 때로는 갑자기 닥쳐올 수 있는 것이기에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삶을 살아야 하는데도 우리는 죽음을 밀쳐내며 살고 있다. 그 결과는 언제나 남에게, 기계에게 위탁하는 죽음이다. 따라서 특정 질환을 가지고 삶의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이 아닌 건강한 사람들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미리 작성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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