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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리소 Jul 20. 2024

곁에 두고 나누는 죽음 이야기

<죽음을 배우는 시간>을 읽고


아버지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가신지 이틀 만에 이생의 모든 끈을 놓고 평안히 떠나셨다. 우린 아버지 발치에 놓인 보호자 침대에 치킨이며 맥주를 늘어놓고 아버지가 기뻐하는 그림을 만들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울 둘째 딸 단비와 아버지의 최애 큰아들 내 동생과 그리고 딸인 나, 이렇게 셋이서 생전에 그토록 흐뭇해하셨던 장면 - 맛있는 음식을 가운데 놓고 함께 모여 웃고 떠드는 -으로 그분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아버지의 침대를 등지고 동생과 딸이 앉았고 나는 아버지의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자못 무거운 병실 분위기를 젖혀버리듯 우리의 깔깔거리는 웃음을 배경으로 나는 아버지가 숨을 크게 한 번 내쉰 후 벌린 입을 조용히 닫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가 가셨다.


목울대를 치는 뜨거움이 솟자 난 튀어 오르듯 일어나 아버지의 침대 옆으로 갔다. 그리고 두 팔로 아버지의 얼굴을 그러안고 말했다.


아빠, 사랑해.

아빠가 내 아빠라서 너무 좋았어.

나중에 만나자.

꼭.


아버지는 가족들 곁에서 비교적 편안하고 행복하게 생을 마감하셨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병원에서, 알 수 없는 기계의 소음에 갇혀 고통스럽게, 고통스럽다고 말하지도 못한 채 말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일어나는 최대의 사건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일생일대의 사건에 대해 새 자동차를 구입할 때보다도 준비를 덜 한다. 스스로 선택한 방식으로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하는 법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심지어 병원에서도 알려주지 않는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상태로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하는 현대 의료는 죽음에 대한 정의마저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사랑하는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하게 눈 감는 것을 최선으로 여기지만, 그런 행운은 극소수에게만 주어진다.  

                                        P.7



현역 의사로서 작가는 가장 가까이에서 일상적으로 죽음을 목격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죽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완화의료를 소개한다. 죽음 앞에서도 인권과 자기 결정권은 존중되어야 하니까.


오랜 옛날부터 근과거까지도 사람들은 집에서 가족과 친지 등 가까운 사람들에 둘러싸여 임종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죽어가는 사람의 곁을 지키는 것은 더 이상 가족들이 아닌 약병과 의사뿐이지요. 죽음이 병원으로 떠넘겨진 다음 수순은 당연히 죽음이 치료해야 하는 질병으로 둔갑하는 거예요. 요즘은 한술 더 떠서 노화조차도 치료가 긴요한 병으로 치부되고 있지요.

                                    P.81



그녀가 말하는 완화의료는 통증을 해소시키고 죽음을 서두르지도 방해하지도 않는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 또한 환자가 사망 전까지는 자신이 택한 능동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돕는 것도 포함된다. 항암치료나 방사선 치료 중에도 환자의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완화의료를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완화의료를 선택하는 경우 상황은 많이 달라진다. 현대의 의료기술이 죽음의 각 단계에 나타나는 증상들을 모두 치료해야 하는 질환으로 보는 반면, 완화의료는 이 모든 증상을 죽음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고 그 과정에서 환자가 통증이나 정신적 스트레스로 고통받는 것을 최소화하는 치료를 목표로 한다.



연명의료 결정법에 사용된 용어들을 살펴보면 "임종 과정"을 마치 삶의 과정에서 뚝 떨어진, 바로 죽음을 예측할 수 있고 죽음이 임박했음을 쉽게 알 수 있는 시기로 보는 인식의 문제가 있다. 죽음을 삶의 일부분으로 끌어들여야 죽음을 극복할 수 있고 죽음이 삶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믿었던 김수영 같은 위대한 시인의 사상을 굳이 빌지 않더라도 죽음은 항상 누구에게나 (비교적) 공정하게 때로는 갑자기 닥쳐올 수 있는 것이기에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삶을 살아야 하는데도 우리는 죽음을 밀쳐내며 살고 있다. 그 결과는 언제나 남에게, 기계에게 위탁하는 죽음이다. 따라서 특정 질환을 가지고 삶의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이 아닌 건강한 사람들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미리 작성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P.186






암 발병 일 년 만에 우리 곁을 떠난 아버지는 비록 힘든 투병생활을 하셨지만 적어도 마지막을 우리들과 함께 지내다가 가셨다. 집과는 다르겠지만 편안한 호스피스 병원에서 몸을 괴롭히는 다른 일체의 시술 없이 그저 진통제 조금과 우리의 웃음소리 곁에서 작별하셨다.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일 년을 두고 서서히 헤어질 준비를 했던 일이 마음에 부드럽게 남아있다.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생을 풍요롭게 한다. 지금 이곳에서의 생이 얼마나 빛나는 시간인지 거듭 생각할 수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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