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남 2녀의 자녀를 둔 시어머니는 전에는 집에서 시누이들의 돌봄을 받으셨다. 그러나 육아도 부모 돌봄도 독박 돌봄은 안될 일이다. 그건 형제들이 모두 분담해서 해야 할 마지막 도리다. 각자 가정을 갖고 있는 시누이들이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어머님을 전담해서 캐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낮에는 주간 보호센터에 다니시고 휴일 하루는 네 명의 자녀가 당번을 정해 종일 어머님을 돌보기로 했다. 셋째 주 당번인 우리가 주일에 어머님 댁에 간 것이다. 전에는 목욕 좀 하시자고 해도 싫다고 하시더니 이번에는 흔쾌히 욕실로 들어가신다. 꼿꼿한 자존심을 내려놓은 어머니는 자신을 돌보도록 며느리인 내게도 기회를 주시기 시작한다. 점심 식사도 잘하시고 아들이랑 몇 마디 말씀도 나누시더니 오후 4시부터 또 '얼른 가라' 노래가 시작되었다. 딸들이 오면 갈까 봐 '언제 와?' 하신다는데, 아들과 며느리는 어쨌든 딸보다는 편치 않으신 거다. 그래도 저녁 약 드시는 것까지는 살펴드려야 하니 얼른 떡국을 끓이고 살치살을 구워 저녁을 차려 드렸다.
매달 어머니는 우리를 만나기까지 한 달만큼 늙어가고 있다. 깔끔하고 외모 단장을 게을리하지 않으셨는데 이젠 파마도 염색도 머리카락 빠지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는지 하얗게 쭉 뻗은 머리를 하고 계신다. 그래도 주방에 서있는 내 곁으로 와서 예전처럼 물건을 제자리에 넣고 뭔가 묻은 곳을 닦아내시는 손길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총기가 반갑고 아깝다.
슬픔이란 무겁고 낮고 축축한 것이어서, 발끝부터 조금씩 젖어들어간다. 사지의 말단부터 차가워지기 시작하다 가슴 어딘가가 무거워지고, 그러다가는 결국 눈가가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것이 우리가 겪는 슬픔의 물리적인 현상이다.
그 낮고 축축한 슬픔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발밑부터 우리를 잠식해 나가고, 우리는 그것을 가벼운 감기나 떨치지 못하는 피로감처럼 짊어지고 오래도록 살아가곤 한다.
황인찬 시인의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의 한 구절이다.
어째 슬픔의 외모가 늙음과 닮아 있단 생각이 든다. 늙어버린 몸은 늘어지고 사지의 말단부터 힘이 빠지기 시작하다가 가슴 어딘가가 공허해지고, 그러다가는 결국 삶의 생기마저 잃어버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젊음을 잠식해 나가고, 우리는 그것을 곧 나을 수 있는 감기나 회복 가능한 피로감보다는 더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육신의 하릴없음으로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변함없이 누구에게나 들이닥칠 늙음을 인생 속에 항상 깃든 슬픔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 늙음이 처음인 우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슬픔인 것처럼 준비하지 못한다.
"얼른 가거라. 아들 기다린다."
어머님의 얼른 가라 노래는 우리가 이젠 가겠다고 항복한 7시까지 계속되었다. 약을 드시게 하고 현관 밖으로 까지 나와서 배웅하지 않도록 살핀다. 그리고 어머님이 눈치채지 못하게 카드 키로 현관을 열고 다시 인사를 한 후 끝이 난다.
몇 달 전부터 자꾸 혼자 나가시려고 해서 안에서 카드 키로만 열 수 있게 채비를 해놓았다고 함께 사는 둘째 아들이 알려준 터였다.
네 남매를 다 키워 독립시킨 후 이젠 연로하신 어머니는 스스로의 손을 졸업하고 자녀들 손으로 자신의 마무리를 맡기는 중이다. 지금도 흐르고 있는 시간은 그 끄트머리에 우리 각자의 생을 어떤 모양으로 변하게 할지 알 수 없다.
브라질의 의사 아나 아란치스는 '죽음이 물었다'라는 에세이에서 사람들은 결국 살아온 대로 죽는다고 한다. 의미 있는 삶을 살지 못했다면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할 기회를 가질 가망도 없다고 말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