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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리소 Apr 03. 2023

내 상처는 어떡할 건데?

두려워하는 딸에게



딸, 이사를 앞두고 네가 말했지.

저녁마다 두려운 마음에 우울하다고. 여태까지 엄마와 떨어져서 산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 먼 곳 부산에서 아이들 키우며 살아갈지 아득하다고. 그 말을 들은 네 사촌 여동생은 나이가 몇 갠데 아직도 엄마 타령이냐고 타박했지만 넌 사촌동생에게 "우린 너네 모녀랑 달라!" 하고 반박하더라.

너의 그 말을 듣고 너와 나는 아직도 서로에 대해서 기대하는 부분이 다르구나 생각했어. 넌 여전히 나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하고, 난 이제는 네가 독립적인 너로 우뚝 서길 바라고 있지.



삼십여 년 전에 나와는 너무나 다른 너를 자식으로 만나고 그야말로 폭풍 같은 일상을 살았어. 너라는 세계를 품기에 나는 너무나 서툰 외계인이었나 봐. 나와는 다른 종족인 너를 견뎌야 하는 나는 생태에 맞지도 않는 행성에 사는 것처럼 걸핏하면 너와 부딪혔어. 세 살 터울 여동생에게 늘 질투하는 마음이 있는 데다 뒤늦게 찾아온 남동생은 안 그래도 아쉬운 엄마사랑을 본격적으로 빼앗는 작은 괴물이었지.


내가 데면데면한 엄마였고, 넌 그런 엄마에게 일부러 보란 듯이 정반대 루틴으로 밀고 나갔었잖아.

기억나?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문자질하다가 늦잠을 자놓고는 깨우는 내게 폭포수 같은 신경질로 내 맘을 헤집어놓고, 늦었으니 얼른 등교하라고 보내놓으니 아침밥 안 줬다고 1교시 빼먹고 밖에서 아침을 드시고 느지막이 등교하는 너.


그땐 정말 버려버리고 싶었다고!


이젠 너도 아이를 키우니 알 거야.

세상 어떤 누구라도 너의 악다구니 사춘기엔 온몸 관절에서 사리가 나오게 생길 거라고 하면 너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웃었잖아.

돌이켜보면 내가 네게 해준 거라곤 자로 잰듯한 내 인생 플랜을 자유분방한 네게 대입해서 서로 상처 입은 것뿐이야.

그때 네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다. 폭주하던 너를 버거워하는 내가 엄마라는 무거운 외투를 벗고 싶을 정도로 자괴감을 느꼈다면 네가 이해할 수 있을까?



네가 사춘기와 ADHD의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올 때 우리 가정은 곧 무너질 것 같은 긴장을 품은 숨죽인 전쟁터였어. 네 아빠도 그때만큼은 사는 걸 그만두고 싶을 지경이었대. 네 동생들을 돌보며 직장까지 다녀야 하는 나도 가시밭길이었고.


그런 너를 공부해 보려고 궁여지책으로 다녔던 정신과. 그곳에서 받았던 수많은 상담, 너를 이해해 보려고 시도했던 영화 보기, 너의 이야기만 듣는 대화하기는 낯선 너와 더 낯선 나를 만나는 작은 오솔길이 되었지.


그 과정에서 너는 나와 많은 부분에서 성향이 다른 사람이었다는 걸, 그래서 어느 지점에서든 너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웠다는 것과 너도 나를 이해하기 어려웠다는 사실을 알았어.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터널도 끝이 나긴 하더라.

네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나니 나와의 관계에도 변화가 있었지.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떨어져 살면서 겪어낸 시간과 우리 속에서 익어가던 이해들이 서서히 꽃을 피웠어.


우리 세 모녀가 옛날이야기하다가 내가 실수했던 일이나 너희에게 섭섭하게 했던 일이 생각나면 바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도 종종 있었어. 그땐 어색했다고, 엄마가 왜 저러나 했다고 그랬지. 엄마도 사과하고 싶어서 그랬어.

엄마가 된다는 건 너희와 보조를 맞춰가며 서서히 완성되는 과정이란 걸 몰랐어.

특히 우리 첫째 딸에게 엄마라는 서툰 첫걸음의 희생양을 만든 건 아닐까 항상 미안했거든.


삶의 변화를 앞두고 두려워하는 딸아,

너의 막연함과 막막함이 얼마나 클지 난 몰라. 그렇지만 그것들이 너를 옭아매서 너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길 바란다. 네가 옮겨갈 그곳에도 여전한 너의 삶이 있어. 네 아이들도 자랄 거고 지금과는 다른 알 수 없는 복병들이 삶의 페이지마다 숨어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너를 송두리째 바꿀 수는 없을 거야.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두려워하지 마. 분명한 건 그 일들은 너를 더 너답게 하는 일에 도움닫기가 될 거야.

학창 시절 너에게 엄마가 자주 하던 말 생각나?

도망치지 말고 피하지 말고 당당히 맞서라고. 그래야 그 일을 헤쳐나갈 방법이 보일 거라고 했잖아. 그 말은 지금 나에게도, 너에게도 유효한 말이란다. 네 앞에 놓인 너의 날들도 엄마가 살아온 날과 비슷한 얼굴일 거야. 모래알같이 예사로운 날과 물결처럼 잔잔한 기쁜 날이 이어질 거야. 그날을 마음껏 바라보는 네가 되었으면 좋겠어.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난 너와 네 동생을 존경해. 너희가 있는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모습이 근사하거든.

네 회사 사장님이 너의 퇴사를 아쉬워하는 것도, 네 동생이 직장 속에서 꼭 필요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는 것도. 이제 엄마는 서서히 너희들의 앞에서 뒷자리로 바꾸는 중이지만 너희가 있어서 든든하고 좋아.

근데 딸아, 너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말이 있어.


그나저나, 내 상처는 어떡할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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