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초입에는 대문 옆 담장에 넝쿨장미가 흐드러진 집이 있다.
장미를 보면서 저렇게 예쁘게 핀 장미가 곧 시든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내가 50대의 초입에 들어왔을 때 우리 집 막내는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다.
그때 난 아들의 심리상담을 받으러 왕복 두 시간의 거리를 버스로 다녔다.
늦둥이 아들을 위해 양육코칭까지 받느라 50이 되었는지 마는지 알지도 못한 채 시간을 보냈다.
아들은 주의력결핍으로 학교 생활을 어려워했고 딸만 키운 난 아들이 처음이라 허둥대고 있었다.
두 딸이 독립해 나가고 막내만 곁에 남았을 때 난 아들의 엄마라는 강한 책임감에 둘러싸여 있었다.
두 아이를 키워 내보내고 늦은 나이까지 새로운 육아를 하느라 정작 나를 키우지는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늙은 엄마인 게 미안한 나는 아들에게 늘 부채의식이 있었다.
'너무 늦게 너를 낳아 외롭게 한 것 같아 미안해.'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가슴에 돌주머니를 찬 것처럼 묵지근했다.
그러면서 가끔 큰 딸이 낳은 두 손자도 돌봤다.
딸들이 뭔가를 요청하면 그들의 도우미가 되었고 손자들의 할머니로 남편의 아내로 종종거리며 살았다.
엄마라면 누구라도 그러하겠지만 나 자신으로는 희미해지고 가족들의 버팀목으로서의 위치만 더욱 단단해지는 걸 느꼈다.
그때 썼던 다이어리를 들춰보면 스스로 생각해도 참 열심히 살았다.
아이들에게 애쓰고 있는 내가 보였다.
경제적인 것으로 부족했으니 다른 것으로는 부족하지 않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문장마다 둥둥 떠 있었다.
'십 대 자녀와 소통하기' 같은 메모를 적어놓고 아들의 마음을 통역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고
상담사 선생님의 미션을 하나하나 수행하며 아들과의 접점을 찾으려 애썼다.
자신의 많은 부분을 문제라고 여기는 아이를 돕고 싶었다.
상담사라는 타인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듣는 일은 낯설었다. 내 존재가 계란 흰자와 노른자로 분리되는 것처럼 여상(如常)하면서도 어색했다. 그러면서 아기 때 버려질뻔한 일이 내게 트라우마로 남아서 내 행동의 근거가 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피부접촉경험과 부모와의 소통 경험이 적다는 사실이 내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발견했다.
근데 그게 뭐!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모든 불쾌한 것은 가능한 한 가볍게 흘려버릴 수 있도록 차라리 매우 산문적이고 냉정한 시선으로 보는 것이 좋다. 주)
가볍게 흘려버리고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 일에서 불신과 냉소의 방식이 작동되고 있었다. 담백하게 산문적이고 냉정한 시선이라면 감정을 숨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날카롭게 베이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프로세스가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와 상관없이 이미 벌어졌고 이미 과거가 된 일을 가져와 '지금'의 서랍에 쑤셔 박고 싶지 않았다.
'자제심을 잃지 않으려 내 생각을 분류해서 정리해 둘 서랍을 갖추고 하나의 서랍을 열 때는 다른 서랍을 전부 닫아두려고 주)' 한다.
이제 이 나이가 되니 과거의 잘못된 관계의 패턴을 정리하고 새로운 관계 맺기에 돌입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 아들의 엄마, 두 손자의 할머니가 된 지금, 과거와는 전혀 다른 관계로의 진입이 내심 다행이다.
그러니,
더 이상 냉소속에 나를 빠뜨리지 않으려면,
내게 어려운 일이 오더라도 쉽게 넘어지지 않으려면,
더 현명해져야 하고 맷집도 단단히 길러야 한다.
이제 오십 대도 후반으로 돌입했다.
요즘은 평균수명을 백사십 세까지로 예측한다. 내 나이로는 지금 생애 절반을 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남은 앞으로의 날들을 쇼펜하우어의 충고대로 소망에 한계를 두고, 욕망의 고삐를 당기고 , 분노를 억제하면서 절제와 인내의 날들을 살아가야겠다.
찬란했던 짧은 한때를 벅차게 피던 장미가 이제 서서히 지고 있다.
5월의 여왕답게 화사하게 피었던 장미는 날이 점점 뜨거워지니 꽃도 작아지고 잎사귀 색도 진해지고 꽃잎도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지는 장미를 보니 시가 저절로 나온다.
잘 지고 싶다.
사람들이 뭐라 하건 괜찮을 정도로
장미는 장미로 지고
나는 나로 지고
잘 지면서 살아야지
전처럼 이기려고 들지 말아야지
살면서 지는 연습
지면서 사는 연습
그렇게 살아야지
마지막 우주에 스며들 때도
고집스러운 얼룩처럼 붙어있지 말고
연한 꽃잎처럼
가볍게 순하게
지워져야지
아무것도 무겁지 않게
어떤 것에도 힘을 풀어
다 놓고 져야지
그렇게 져야지
주) 쇼펜하우어 인생론, 쇼펜하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