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이거 좋아했네!
난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말을 잘 못해서 그렇다. 말을 시작하면 머릿속의 생각이 사방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려고 병목현상을 일으킨다. 조리 있고 설득력 있는 논리가 없어서 말보다는 눈을 반달로 만들고 입꼬리를 올리는 게 더 편하다.
목소리도 낮은 데다가 부모님 고향이 두 분 다 전라도라서 내 억양의 아주 미세한 부분은 전라도의 리듬이 배어 있다.
낮은 목소리에 복근도 없어서 배에 힘을 주지 못하고 무리하게 목을 긁는 소리를 낸다. 그래서 끝음이 갈라지고 듣기 싫다. 녹음한 목소리는 더 웃기다. 소년과 중년 아줌마 그 중간쯤에서 헤매는 목소리다.
그런 내가 더 이상 지하로 숨지 않고 덜컥 대학로 낭독극에 출연결정을 해버렸다. 내가 한 게 아니고 그냥 떠밀려버린 것이다. 그저 공저책에 글 두 꼭지 쓴 것밖에 없다. 쟁쟁하게 빛나는 작가남들 사이에 소박하고 저렴하게 꼽사리 낀 글이지만 이 글이 이곳에 있어야 할 당위성은 내가 판단할 것은 아니다.
엄마의 유산은 거대한 물결이다. 거대한 물결 속에 물 한 방울인 나는 그것만큼의 역할을 하면 된다.
거기에서 나는 '목소리가 이상하다, 한 번도 안 해봤다, 내가 듣기 싫다, 도망치고 싶다, 안 하고 싶다.... 블라블라' 떠들어봤자 소용없다.
물 한 방울은 물결을 따라가면 그뿐이다. 이런 내면의 못난 소리를 가뿐히 떨치고 다시 원고를 잡고 목소리를 열고 녹음을 해보고 다시 고치고 또 고치고 있는 내가 좋다.
나를 이기는 쾌감이 쩐다!!!!!!
진짜 그렇다.
나는 나를 이겨본 적이 별로 없지만 이기는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내면은 더 단단해지고 확신은 굳어지고 꿈은 내 눈앞에 완성본의 분위기를 맛 보여준다.
자기를 성찰한다는 것은 지극히 고통스러운 삶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어서 대다수 사람은 이를 피해 가려고 한다. 그러나 진실에 헌신하는 사람에게는 그 고통이 상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므로 (따라서 점점 덜 고통스럽게 되고) 점점 더 자기 성찰의 길로 나아간다.
- 아직도 가야 할 길, 스캇 펙.
지금 물결에 몸을 맡긴 채 고통을 뛰어넘어 진실에 헌신하고 있다는 생각은 비약이 아닐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 기어 다니며 세상을 탐색하듯이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조금씩 발견하고 있다.
책을 읽으며 나를 알아가고, 글이 이끄는 대로 새로운 도전에 나를 맡겨본다.
아이는 문지방 하나를 넘어가면서 방바닥에 떨어진 모든 물건을 입에 넣어 보며 배운다.
쓰고, 달고, 딱딱하고, 부드러운 것들의 속성을 자신의 입력값에 새긴다. 이건 내 취향 아니고 이건 못 먹는 거고 이건 씹으면 어떤 맛이 나는지.
소로우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들에 자신을 완전히 맡겨버리지 않는다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관찰자적 태도를 가진다고 한다.
비로소 나도 소로우처럼 나를 관찰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온 존재를 바쳐 몰두하는 단 한 가지의 일은 '바라보는 일'입니다. 나는 감정을 느끼기보다는 '보는 일'에 더 온전히 몰입합니다.
-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이번 주 내가 좋아하는 건 바로 이것!!!
내가 나를 이기고, 이기는 나를 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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