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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리소 May 09. 2023

인생에 장이 달라진 순간

또 다른 문을 연 것일까?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앞둔 평일 부산에서 올라온 딸 가족이 이틀밤이나 우리 집에서 지냈다. 며칠 전부터 딸이 통화할 때마다 식사 메뉴에 김치찌개를 꼭 넣어야 한다고 성화다.


사위는 음식에 진심인 스타일이다. 큰딸은 늘 다이어트를 일상으로 하고 있어선지 먹방을 좋아한다. 그런 취향으로 식구들을 음식으로 고문(?)하는 걸 낙으로 삼는 아이다. 그렇게 딸 부부가 푸드 파이터 어벤저스를 이루어 지내다 보니 사위도 몸무게가 가파르게 올랐고 손자들도 또래보다 덩치도 좋고 키도 큰 편이다.


사위의 최애 음식은 가짓수가 많지만, 장모 맞춤 메뉴로는 김치찌개다.

며칠 전부터 다이어트를 결심한 사위가 장모님 김치찌개를 위로삼아 샐러드만 먹는 우울한 저녁을 견뎠단다. 그마저 이틀째는 힘도 없고 당도 떨어지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고 지만.


목요일 저녁 늦게 우리 집에 도착한 사위와 딸은 11시가 넘었는데도 김치찌개 냄새를 맡더니 코를 킁킁거린다. 사위는 그냥 자겠다고 하더니만 딸이 내게 밥 달라고 하는 걸 보고는 슬그머니 식탁에 앉는다.

커다란 냉면볼에 김치찌개를 담고 밥이랑 반찬 두어 가지를 낸다. 사위는 김치찌개 앞에서 다른 반찬은 필요 없다며 곧바로 전투모드가 된다. 한 숟갈 떠먹더니 감동적인 맛이라고 추켜세운다. 딸도 미쳤다, 미쳤어를 연발하며 연신 숟가락질을 한다. 사위 말로는 자기 어머니와 아내의 김치찌개도 맛있지만 내가 만든 김치찌개는 뭔가 깊으면서도 칼칼하고 영혼을 위로하는 맛이라고 한다.

다분히 내성적이고 자기 마음을 이야기하는 게 서투른 사위가 하는 말이라 진심이 느껴져서 고맙다. 김치찌개는 그냥 힘을 빼고 밥 하듯이 하는 메뉴라서 신경도 쓰지 않고 만드는데 이렇게 맛있다고 하니 더 맛있게 해 주려고 마음을 쓰게 된다. 내 입엔 어느 포인트가 맛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저 맛의 장벽이 낮은 사위의 입맛이 고마울 따름이다.






다음날은 종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공기가 낮게 깔리는 날이다. 일찍 일어난 손자들이 각각 먹고 싶은 것도 달라서 취향에 맞는 반찬으로 밥을 먹였다. 딸에겐 더 자라고 했더니 배고프다며 바로 일어난다. 가족들 하나하나 챙겨주고 식사를 끝내고 앞치마를 벗고 앉았다.

날씨도 을씨년스럽고 너무 좋다며 차 한잔 하자고 했다. 딸이 그라인더에 커피를 갈아 내리고 잔을 들고 식탁에 앉는다. 이 얘기 저 얘기 대화 중에 엄마가 많이 변한 것 같단다. 예전에는 누굴 챙기기보다 자기 자신이 먼저였다면 이젠 식구들이 좋아하는 걸 해주는 즐거움이 생겼나 보다고 미소를 짓는다. 그건 나 스스로도 느끼는 바다. 애쓰고 수고해서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일이 즐거워진 것이다. 하루하루 늙어가고 있지만 숲이 계절에 따라 색을 달리하는 것처럼 늙어감의 깊은 숲에서 발견하는 성숙인 건가, 유행가 가사처럼 늙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것일까?




언제부턴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나 관공서에 가거나 병원 진료를 하러 가면 대면하는 사람들이 나를 예전의 나처럼 대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어른에게 하듯 깍듯하게, 그러나 조금 밀어내는 듯, 자기네들이랑은 상관없다는 듯이 차이를 두며 대한다. 대놓고 묻는다면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체감하기에 그렇다. 그럴 때마다 그렇게 취급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득하려는 듯 거울을 본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는 나 자신에게 납득을 시켜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다.

칙칙해진 혈색에다 처진 눈매며 아래로 선명해진 팔자주름을 발견하고는 그렇단다 하고 날 이해시킨다. 그게 슬프지는 않은데(가끔은 슬프다) 나의 인식과 현실의 괴리를 받아들이기가 어색하다. 내면의 상황은 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데 외면과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은 달라졌음을 느끼니 난감할 때가 있다.


자자, 나여!

나의 내면과 현실의 상황을 잘 매치시키자.


손자들과 딸 가족을 만나면 그런 괴리가 더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현실 속 위치와 내 속의 상황과의 불일치가 종종 나를 허둥대게 만든다. 딸이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나서 그 아이들이 내게 할머니라고 불러도 그 불일치가 깨끗이 사라지진 않았다. 근데 요새 들어 조금씩 한 겹 한 겹 모서리를 맞추어나가는 기분이다. 비유하자면 나 자신이 '딱딱한 알사탕'에서 '말랑하고 유연한 젤리'화가 되어가는 것 같다.


서서히 시나브로 변하고 있는데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지내다 보면 어느새 아뿔싸! 언제 이렇게 변했을까 당황하게 될 터다. 그래서 신은 인생이 서서히 변할 때를 맞춰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하거나 느끼게 하는 것 같다. 숲이나 나무나 꽃이나 자연을 보게 한다거나.

중년이나 노년의 사진 주제가 다른 것보다는 꽃이나 아기인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큰딸이 최근에 시험에도 응시하고 공부하고 있는 분야가 피부 메이크업이다. 지 남동생과 나를 나란히 눕혀놓고 마사지 연습을 한다며 수선이다. 자기 가족들도 대전에 있는 여동생도 다 실습 대상자가 되었다며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겠다고 설친다.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을 참고 기꺼이 실습 대상이 된다.



두 모자가 손을 잡고 누워 있는 게 가소롭고 웃기 다며 딸이 찍어준 사진입니다. 흉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투척합니다.


예전에는 내가 아이들을 주도하며 살았지만 이젠 아이들이 나를 주도하도록 힘을 빼는 경우가 많다. 아직은 육아며 인생, 혹은 짧은 식견의 신앙 이야기로 아이들의 삶에 참견 중이지만 그것도 그들이 요청할 때에만 슬그머니 내놓곤 한다.


어쩐지 인생의 다른 문이 안개처럼 열린 기분이다. 그 문을 열었더니 하얗게 재가 된 어제의 내 시간이 살포시 내려앉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뭐 생이란 게 딱 선을 그어 여기까지가 젊음의 날, 거기서부터 노년의 삶 시작!
이러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60대, 70대가 되면 또 어떤 문이 열릴지 자못 기대하게 된다. 평소에 알고 지내는 60대와 70대의 선배들이 명랑하고 발랄하게 사는 것처럼 될까? 그 장이 어떻게 펼쳐질지 혹은 지금과는 다르게 좀 더 을씨년스러울 수을지 모른다. 이런 날씨 저런 날씨여도 다 좋아하는 나지만 그때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내게 달렸겠지.

어떤 마음이 들든지 억누르지 않기로 하자.

그냥 그 마음을 바라보고 지금은 내가 그렇구나 하며 어떻게 달라질지 기다릴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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