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잊히면 안 되는 이름 - 22화

너무 소중해서 감추고 싶은 내 보물

by 벙긋 웃는 문혜력

사실,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나의 아이들이다. 그런데도 여태 나의 아이들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그들을 잘 돌보지 못하고 있음을 들킬까 봐 두려웠을까?


유일하게 내 품에 남겨진 내 새끼들... 금이, 산이, 그리고 막내 밀감이.

나를 한없이 신뢰하고 의지하며 살아온 내 몽글몽글한 새끼들은 자라면서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가 버렸다. 나만의 자격지심인지 확실치 않지만, 그들은 더 이상 나의 물리적인 보호를 의지하지 못하고 각각 다른 모양으로 방황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금이는 내가 어렸을 때와 비슷하게 책 속으로 숨어버렸다. 밤이나 낮이나 금이의 곁은 같은 반 아이들에게서 빌려 온 책들로 가득했다. 국민학교 4학년 때였나. 한 번은 금이가 은선이라는 친구 집에 놀러 갔다. 그 사건을 이야기하게에 앞서 은선이에 대해 잠깐 소개해 본다면, 은선이는 엄마아버지가 교수이고 늘 바쁜 사람들이어서 함께 사는 친할머니와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는 아이였다. 은선이는 성격이 넉넉하고 느긋한 아이였다. 은선이는 금이와 놀기 위해 책을 빌려주겠다는 제안을 자주 했다. 안타깝게도 금이에게 제 값 주고 사준 책이라고는 계몽사에서 출간한 노란 표지의 '장발장'이라는 책뿐이었다. 그래서인가 책을 좋아하는 금이는 은선이의 유혹을 단번에 수락하곤 했다. 은선이네 집에 가면 그 노란 표지의 책들이 한 두 권이 아니었다. 시리즈별로 12권 또는 24권 한 질씩 유리로 먼지를 차단한 책장 안에 가득히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금이의 표현에 의하면 그랬다. 그 큰 거실 3면을 큰 책장들이 위풍당당하게 차지하고 있어서 금이는 은선이의 집에 가면 그 책들에 홀려 은선이와 함께 책도 읽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들고 올 수 있는 양껏 7권까지 잔뜩 책을 빌려와 읽곤 했다. 금이의 읽는 속도는 점점 빨라져서 일주일이면 그 작은 글씨로 빼곡한 책들을 몇 권이고 모두 읽어치웠다. 사건은 이랬다. 적어도 금이에게는 큰 사건이었다. 금이가 여느 때와 같이 은선이네에 놀러 간 그날, 표정은 친절하지 않았지만 가끔 라면도 끓여주고 과자도 내어주던 은선이 할머니가 금이에게 물었다.

"너, 이 책들 다 읽어봤니?"

금이는 그 말을 하고 있던 할머니의 표정이 참 의기양양해 보였다고 했다. 정말 다 읽었는지 궁금해서가 아니라 '너는 이런 책들을 읽을 주제가 못되지?'라는 말로 들렸다고도 했다. 금이가 그 집에 드나들면서 이미 그 책들은 모두 읽은 상태여서 금이는 아이답게 모두 읽었다고 답했다. 그러자 노인은 자신의 손녀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너는? 이게 다 니 책들인데?"

은선이는 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할머니에게 무심하게 대꾸했다.

"내가 왜? 아무 때나 읽고 싶으면 읽으면 되지. 몇 권은 읽었어. 근데 기억도 안 나네."

그 말에 얼굴이 새빨개진 노인은 은선이에게 대노를 하였다. 은선이는 할머니의 호된 꾸지람에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고 그 일이 금이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다. 금이 자신에 대한 분노인 것 같았고 은선이 할머니가 자신을 업수이 여기는 행동으로 여겨진다 했다. 그 이후로 은선이하고는 학교에서만 놀았다. 금이는 학년이 바뀌어 키가 커서 오징어란 별명을 가진 은주와 가까워졌다. 은주엄마는 털털한 성격을 가진 지적인 사람이었고 나와 말이 잘 통하는 이웃이었다. 우리 집은 좁아서 은주네 집에 우리 모녀는 종종 찾아갔다. 은주와 금이는 엄청난 양의 만화책을 섭렵했다. 은주는 받은 용돈을 털어 만화가게에서 만화책들을 10권씩 빌려왔고 금이는 은주의 방에서 그녀와 숨을 못 쉴 정도로 웃어가며 그 책들을 읽었다. 만화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던 그때였지만, 나는 못 읽을 것도 없다 생각되었다. 아이들이 만화에 흥미를 갖는 것이 밖에 나가서 길거리를 배회하는 것보단 나았다.

금이는 사리를 따지는, 어떻게 보면 냉정해 보이는 그런 아이로 변해갔다. 나의 말도 그녀에겐 판단의 대상이 되었다.

"엄마, 무슨 일이든 사람들과 약속한 날짜에 딱 매듭지을 수 없어? 그렇게 남한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 그건 무능한 거야."

나쁜 계집애 같으니라고! 엄마에게 못하는 말이 없네. 금이는 내가 죽은 이후로 내내 자신이 뱉은 그 한마디에 가슴을 후비며 '엄마, 미안해.'를 거듭하고 있다. 아가, 엄마가 지금은 잊었고 너의 말이 그르지 않다는 것도 알고 이젠 상처가 아니란다. 제발 마음 편하게 너의 삶을 잘 살아주기를 이 엄마는 소원해.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잊히면 안 되는 이름 - 2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