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더 억울해
혜자에게.
혜자야, 너는 똑똑하고 강하고 예쁜 나의 자매야. 정숙이처럼 억세지 않으면서 더 강하고, 순자처럼 순하지만 어눌하지 않고, 욕심은 많지만 봉숙이처럼 사사롭지 않다. 무엇보다도 나처럼 생각의 틀에 갇혀있지 않고 돌파하는 너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잘난 남자 만나서 부잣집에 시집간다고 모두들 너를 부러워했는데 날마다 병들어 가는 모습을 이렇게 지켜만 보고 있구나.
너는 네가 그렇게 되기까지 네가 당하고 있는 모든 일을 사명처럼 끌어안고 있는 게 더욱 속상하다.
너의 시부모님 점잖고 좋으신 분들처럼 보여서 안심됐었는데, 시집살이라는 것이 친정살이만큼이나 어려운 것이었을까.
영원히 잘 될 것 같았던 엄마 아버지의 가게가 시장이 무슨 소송에 걸리면서 기울어 가더니, 잘 못 하면 시장사람들과 함께 거리에 나앉게 생긴 그 시점부터였던 것 같다. 너의 망가져가는 모습이 극 사실화처럼 내 눈을, 내 가슴을 멍들게 만든 그 시작점이.
제부가 찐빵이의 대학 등록금을 부담하겠다고 나선 그때가 더 정확한 시점이었을까.
.....
명문대에 진학한 찐빵이는 혜자네에게 신세를 지고 말았다. 찐빵이도 넷째 누나의 모습에 맘이 늘 편치 않아 보였다.
매사에 투명하다고나 할까 눈치가 없다고나 할까. 제부는 자신의 선행을 감추는 법이 없다. 그저 선량한 웃음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참 구김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선행은 혜자를 힘들게 했다.
그의 부모는 혜자에게 친정이 거지라고 했단다. 아들이 있을 때는 한없이 선량한 그들이 혜자와 독대하는 순간에는 사정이 달라진다고 했다. 아들의 처가에 대한 호의를 혜자의 주모로 몰아갔다. 혜자는 그런 대접을 받는 게 죽기보다 싫다 했다. 그러나 막내 찐빵이는 누구라도 공부를 시켜야 하지 않겠냐고 했고 그래서 남편의 선심을 못 이기는 척 허용하고 있다고 했다.
무슨 그렇게 가슴 아픈 얘기를 너는 그리도 담담하게 쏟아내는 거냐.
"큰 언니, 내가 속이 시끄러워서 언니한테만 말하는 거야. 다른 식구들에겐 함구해 줘."
찐빵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시장이 패소를 해서 엄마아버지는 이제 정말 찐빵이에게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 사이 혜자는 뇌에 종양이 생겨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유증으로 목구멍부터 입속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염증이 그녀를 괴롭혔다. 음식물을 삼키는 것도 고통스러워했고 말할 때마다 "쓰읍"하는 소리와 함께 가까스로 침을 삼켰다. 입술이 퉁퉁 부어 제대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직도 한없이 젊은 너에게 그 빛나던 시절은 다 어디로 가 버린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