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변태스럽게
기억이 하나도 안나!
결국 독서법 관련 서적을 읽고 말았다.
책을 읽을 때마다 그 ‘비효율성’에 스스로 감탄하곤 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같은 책을 두 번, 세 번씩 읽기 시작했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처음에는 어쩌다가 한 번씩 하는 독서에 어떤 뚜렷한 목표가 있던 것도 아니었고,
나름대로 어찌 됐건 책을 읽었으니 지식이던 어휘력이던 뭔가 조금이라도 삶에 플러스가 되긴 했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을 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평소 독서를 좋아하고 취미 상활로 즐기는 것이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닌데 이런 비효율적인 짓을 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해지기 시작했다.
수 시간을 투자해서 겨우 새로운 단어 한두 개, 혹은 400페이지를 읽고 기껏해야 띠지에 적힌 문구 하나 기억에 추가하는 건 미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유튜브에서 동일한 책을 요약해서 리뷰 해 주는 10분짜리 동영상을 보는 게 더 기억에 남고 시간도 절약된다.
물론 책을 읽는 이유가 지식의 증가 말고도 사고력의 확장도 있으니 비록 기억은 제로에 가까워도 내 사고가 좀 더 논리적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간혹 지인들과 대화를 해보면 늘 근거와 논리는 건너뛴 우기기의 감정적 공감과 대립만, 마치 흡연실에 꽉 들어찬 연기처럼 가득하다.
독서의 목표를 시간 때우기로 잡지 않는 이상 헛 독서의 전형적인 표본이 있다면 그게 바로 나였다.
그래도, 그동안 독서법 관련 책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른 책을 읽는 것도 나에게는 큰마음을 먹어야만 하는 일인데, 책을 읽는 법을 알려주는 책을 읽는다는 건 뭔가 시간 낭비 같은 느낌이 있었다.
거기에 독서법, 부자 되는 법, 이성을 유혹하는 법 같은 방법론 관련 책에 늘 붙어 다니는 기적, 혁명, 한방에, 따위의 약장수 같은 제목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점점 팍팍해지는 요즘 마음이 자꾸 요행 쪽으로 기운다.
요 몇 주 동안 로또, 연금, 즉석의 복권 3남매를 꾸준히 구입하며 트리플크라운을 노리고 있다는 건 내 삶을 온통 기적에 맡기려는 강한 의지를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때 마침 눈에 들어온 '기적'이라는 단어가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일지도 모른다.
기적의 독서법이라!
그래 돈은 글렀다 쳐도 살면서 뭐라도 나도 기적 좀 한번 체험해 보자!
그렇게 이 책은 e북으로 나의 태블릿 속으로 흘러들었다.
누구나 뻔한 약장수의 말에 넘어가는 순간이 있다.
<나의 생각>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도쿄대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문>
저자가 중 하위권 수준의 고등학교에서도 만년 하위권을 유지하다가, 독서법을 바꾸고 최고의 명문대인 도쿄대에 전국 4등으로 합격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게 아니다.
단지 저자와 나 사이의 간극이 너무 심하다는 걸 느꼈을 뿐이다.
어쩌면 우린 만년 하위권이라는 비슷한 출발점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같아도 같은 게 아니다.
책 한 권 안 읽던 만년 하위권 학생이 갑자기 대학에 가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 충분히.
하지만 보통 남을 웃기려고 하지 않은 다음에야 출생 국가 최고의 명문대에 가겠다는 마음이 생기지는 않는다.
저자는 특별한 사람인 것이다.
다만 보통 사람과의 갭을 매워 독자와의 눈높이를 맞추어 '만년 하위권인 내가 했으니 당신도 할 수 있다.'라는 느낌을 주어야 하기에 겸손한 멘트를 집어넣은 것뿐일 거야! 난 안 속아!
심리학 입문이라는 책을 읽으며 심리학에 대해 조금 아는 것에 만족하자는 식의 기대는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
그 책을 통해 심리학에 대해 매우 박식해 질지도 모르는데...
<본문>
저자의 마인드를 엿볼 수 있는 이런 문장들은 나를 좌절하게 만든다.
고교시절까지 책이라곤 만화책과 라이트노벨 같은 엄마 피꺼솟 하는 분야만 보다가도, 갑자기 최고 명문대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더니, 독서 한 권을 해도 모든 걸 얻어내겠다는 마인드.
안 할 거면 아예 안 하고, 할 거면 제대로 하자는 이런 극단적인 마인드는 주로 천재들에게 나타나는 DNA 배열이 아니던가.
이 책에서 알려주는 독서법만 알면 공부머리를 기를 수 있다!
<띠지 문구, 공부의 신 대표 강성태>
뭐 내가 이제 와서 공부머리를 기르려고 한건 아니다.
하지만 강성태 양반의 이 카피는 단지 세일즈 포인트를 넘어 책의 정확한 압축 문구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다루는 5단계의 독서법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이렇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공부머리가 길러질 수밖에.
이 책의 독서법을 가장 잘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아마도 성감대를 안구로 옮기고 '책 성애자'가 되는 것이다.
독서에서 만큼은 변태가 용인되는 것인가?
한편으로는 일본의 인기 먹방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가 생각나기도 한다.
음식이 나오기 전부터 그 기대감에 흥분하고 흠향하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발라먹고, 더 먹고, 다 먹고, 기억을 더듬고 하는 걸 음식 대신 책에 적용해 보자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책 제목을 발견한 순간, 명품 신상에 눈 돌아가는 여인처럼 극도의 소유욕을 가져도 되는 것은 명품 신상과 달리 가격이 매우 저렴하다는 것이다.
그 표지를 만지는 순간 첫 키스의 느낌이 되살아 나듯 극도의 흥분감에 사로잡힌다.
한 장 한 장 넘기는 책장 소리가 귀를 간지럽히고, 눈에 들어온 까만 글씨의 섹시함에 매료되어 두 눈을 뗄 수가 없다.
독서의 과정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핥는 것이다.
그 단어 문장 하나하나가 뇌 속으로 들어오는 짜릿함에 전율하는 것이다.
최대한 기억에 남겨 자신 또한 뇌섹남(여)에 한 발짝 더 다가가기 위해 이 책에서 제시하는 5단계의 독서법을 빼먹지 않고 이용한다면 분명 작가의 말처럼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도쿄대에 합격해 있었다.
<본문>
같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위의 문장의 포인트는 무엇인가?
정신이 나가 있었다는 것이다.
정신이 나갈 만큼 책을 완전히 해체하고 벗겨먹으라는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이 5단계의 다섯 가지 독서법 중에 그동안 내가 하고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역시 공부 못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나름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에서 소개한 인간의 '시간 대비 기억 상태'를 나타내는 해빙의 망각곡선이 나를 극단적 저능아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름 일반적인 하위권이었던 것이다.
끝으로, 현 미국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의 인기는 정말이지 대단하다는 느낌이 든다.
미국, 프랑스, 이스라엘, 한국 저자의 최근 읽은 3권의 책도 모자라 일본 저자의 독서법 관련 서적에까지 상당량의 예시로 트럼프가 언급된 것은 미처 예상치 못한 기습이었다.
물론 이번에도 역시나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인식에 가깝다.
이런 것들은 보통 무심코 지나가지만, 의식하지 않으면 반복적으로 무의식에 자리 잡게 된다.
책을 쓰는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예시를 같다 쓰지 않는다.
이런 무의식에 관한 잠재의식 효과는 나의 뇌피셜이 아니라 이 책의 저자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라는 것이 사실 큰 문제다.
(중략)
하지만, 그것은 상당히 무서운 일 아닌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의견이 정립되고 마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은 상태에서 방향성이 멋대로 정해지는 것이다.
<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