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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무드북

[드라마]HBO ‘화이트 로투스‘ 시즌 2(2022)

성(性) 정치학 개론

by 스투키

시즌 내내 극 중 배경인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자연과 고풍스러운 건축미에 매료되다 보니, 그곳에서 벌어지는 치정과 매춘, 갈등은 어느새 사소하게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그 눈부신 풍경에 취해 시칠리아가 피로 빚어진 마피아의 유산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선, 여전히 또 다른 피가 필요하다는 것 또한 말이죠.

<화이트 로투스>시즌 2에 등장하는 노부부와 그들의 비서, 친구 사이인 두 쌍의 부부, 그리고 삼대에 걸친 남자들—할아버지, 아들, 손자—모두는 어쩌면 시칠리아에 끊임없이 공급되는 적혈구 같은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권력과 탐욕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검은 돈, 섹스, 폭력은 산소와도 같습니다.

그것들은 에트나 화산의 타오르는 분화구 아래, 반짝이는 지중해를 타고 시칠리아 전역을 위태롭게 순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性) 역할과 *젠더를 둘러싼 담론이 포화 상태에 이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담론이 넘칠수록 사람들 사이의 소통은 더욱 단절되고 있죠. ​

“agree to disagree.”는 대화를 포기하는 가장 정중한 방식으로 더는 설득하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이 사회의 담론에 쌓인 피로도를 대변합니다.

이에 《화이트 로투스》 시즌 2는 이 단절된 담론을 다시 대화 테이블 위로 끌어오고 싶어 하는 눈치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경험이라는 서사를 활용합니다.

단절됐던 엘비와 포샤는 큰 사기극의 표적이 되는 경험을 지나서야 다시 이야기해 볼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퍼와 이선 부부 또한 친구의 배우자와의 불륜 의심을 기어이 현실로 만들고 나서야 대화의 접점을 찾습니다.


대화는 사라지고, 방화벽은 단단해졌기에 사람들은 이제 가능한 한 극단적인 경험을 통해서만 서로를 이해할 여지가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

이것은 비극입니다. ​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극단적인 상황을 추구하지도 경험하지도 않습니다.

결국, 그 강도 높은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화이트 로투스》가 보여주는 게 하나 있다면 그것은 담론은 대화 없이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편의 바람을 감내한 도미닉의 어머니든,

고통의 대가로 맞바람을 선택한 다프네든,

그들의 방식은 담론에 따라 변화하긴 했지만, 진전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서로의 등을 맞댄 채 견디는 법만 달라졌을 뿐입니다.

​사랑한다고 꼭 상대를 다 알 필요는 없어요.
전 미스테리가 좋아요.
미스테리는 섹시하니까.
-다프네-

다프네의 말처럼, 시즌 2는 시즌 1과 달리 ‘섹시한 미스터리’가 전반을 흐릅니다.

시즌 1이 ‘돈과 권력’의 역학을 조명했다면, 시즌 2는 ‘섹스와 권력’의 게임에 더 집중하죠.

인간의 속성상 관심은 돈에 가지만, 흥미는 섹스에 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렇기에 섹스를 매개로 한 권력의 작동 방식이 중심이 된 시즌 2가 유독 더 자극적이고 재미있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이 재미는 말초적인 층위에서 발생합니다.

시즌 2는 애초에 계획된 후속작이 아니었기에, 시즌 1처럼 사회적 이슈를 예리하게 파고드는 세밀한 접근은 다소 부족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작진은 조금 더 헐리우드가 다루기 쉬운 이야기 구조—즉, 섹스, 미스터리, 배신, 반전—로 방향을 조정한 것처럼 보입니다.​

결국 이번 시즌은 《섹스 앤 더 시티》의 욕망과 《위기의 주부들》의 위선을 《화이트 로투스》 시즌 1의 냉소적인 시선으로 버무린, 잘 만들어진 외전처럼 느껴집니다.

눈부신 자연과 화려한 건축미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섹시한 미스터리 속에서 사회적 담론이 끼어들 자리를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사실 이 시즌에서 그런 담론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무방한’ 정도의 위치에 머물러 있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이트 로투스》 특유의 씁쓸한 여운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시즌 2를 보는 내내 저 아름다운 시칠리아 섬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기에 이번 시즌에서 가장 탐이 났던 건—의외로—타냐의 돈이었습니다.

어디든 갈 수 있는, 제약 없는 자본!

​하지만 그 자유의 대가는 외로움이었고, 타냐는 그 고독 속에 서서히 잠식당합니다.

그 취약함을 파고든 범죄의 늪은 깊고도 붉었죠.

타냐 맥콰드(제니퍼 쿨리지 扮)는 사실상 시즌 1의 못다한 이야기입니다.

시즌 2에 다시 그녀가 등장했을 때, 처음엔 그저 코미디를 위한 보조적 장치 정도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번 타냐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조수 포샤(헤일리 루 리처드슨 扮)를 대동한 채 나타났고,

포샤를 시즌 2의 혼돈 속에 떨궈놓은 뒤, 자신은 마치 시즌 1을 끝내기 위해 미래에서 온 터미네이터처럼 이 시즌을 통째로 장악해 버렸습니다.

​이 시리즈의 팬이라면 누구라도 타냐가 시즌 3에도 등장하길 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막대한 재산도 그녀를 되살려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시청자는 화면 너머 어두운 지중해 위로 화염을 내뿜는 에트나 화산을 보며, 계획보다 더 확실하게 타냐의 전 재산을 앗아간 남편 그렉(존 그리스 扮)의 사악한 웃음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휴양지에서 벌어진 많은 섹스 속에 사랑은 없었습니다.

그저 돈과 탐욕, 쾌락과 권력의 몸부림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

이번 시즌 휴양지를 찾은 이들은 지난 시즌과 달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뭔가 하나씩의 상처를 더해 돌아갑니다.


시즌 2의 승자는 시즌 1과는 반대로 휴양지에 남겨진 네 명의 여성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각각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 그리고 성 노동자 였습니다.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 까요?​

권력의 역학에서 ‘돈’보다 ‘섹스’가 더 우위에 있으며,

그것을 무기화할 수 있는 여성이 남성과의 권력 구도에서 얼마든지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걸까요?


타냐는 결국 남자로부터 총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그 총으로 범죄자인 남자들을 모두 쏴 죽이고 바다에 빠져 죽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순교였을까요?




* 젠더(gender) : 사회적으로 정의된 성을 뜻하며, 생물학적 성인 섹스(sex)와는 구분된다.

* 성(gender) 인지 감수성 : 성별의 차이로 인한 일상생활 속에서의 차별적인 요소와 불균형을 이해하고 인지하는 민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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