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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무드북

[드라마]HBO ‘화이트 로투스‘ 시즌 3(2025)

부처는 가고 니체만 남았다

by 스투키

매번 의문의 살해를 당한 시체로 시작을 알리는 이 미스테리성 *앤솔러지 블랙코미디 시리즈는 이제 제가 애정하는 작품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번 시즌에서 느껴지는 불안한 기운은 오히려 그 애정을 집착으로 바꾸어 놓은 듯합니다.


그렇다고 이번 시즌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전개가 지나치게 느리다던가 직원들의 서사가 빈약하다던가—에 반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러한 비판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그 원천이 아직은 애정에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화이트 로투스>의 모든 시즌을 지켜보면서 저는 또 한 번 평소 마음 한 켠에 가지고 있던 의문을 떠올렸습니다.


“왜 이들은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죄인으로 몰아붙이지 못해서 안달이 났을까?”


서구 문명이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구축한 자유주의의 유산은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찬란한 발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는 그 발전의 이면—소수자의 피와 희생, 착취와 억압—에만 매달려 그것을 들춰내고, 부풀리고, 마침내 붕괴시키려 합니다.

저는 이런 현상이 이젠 자각과 반성을 한참 넘어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듯, 다친 팔을 고치겠다고 머리를 잘라내는 수준의 파괴와 광기의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주류를 악마화하는 데 따르는 실질적인 보상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에 어떤 설명하기 어려운 쾌감이 존재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인간에게는 동경과 파괴에 대한 욕망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화이트 로투스>의 **마이크 화이트는 이 점에 있어 언제나 솔직했습니다.

그는 자국의 주류로 여겨지는 기독교 백인 상류층 가정을 철저히 무너트리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 않았고, 그 욕망은 시즌을 거듭할수록 정신적인 붕괴에서 물리적인 파괴로 단계적으로 확장되어 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시즌은 마이크 화이트의 냉소적인 파괴의 시선이 도달한 엔드게임, 최종 단계였다고 생각합니다.


<화이트 로투스>에서 배경은 언제나 인간의 욕망과 위선을 비추는 조명탑 역할을 해왔습니다.

돈(money)과 권력의 역학을 다룬 첫 시즌의 하와이 마우이섬은, 미국 제국주의의 흔적이자 동시에 상류층의 호화로운 휴양지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 공간이었습니다.

두 번째 시즌의 시칠리아는 피로 물든 마피아의 남성성이 깃들어 있는 풍경 속에서, 성(Sex) 정치에 얽힌 인물 군상을 풀어내기에 가장 적합한 무대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시즌, <화이트 로투스>는 배경으로 불교의 나라 태국 코사무이의 힐링 리조트를 선택함으로써, ‘영성(Spirituality)’이라는 이름 아래 동양 문화를 소비하는 서구 상류층의 영적 허영을 조준하고 있습니다.

정화와 자아 찾기의 탈을 쓴 자기도취, 그리고 죄책감마저 허영으로 변질된 위선은 태국의 습한 햇살 뒤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번 시즌에서 <화이트 로투스> 특유의 냉소와 조소는 더 이상 인간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마이크 화이트의 거침없는 블랙코미디는 이제 종교를 향해서도 조용히 칼날을 들이댑니다.


불교는 윤회를 바탕으로, 카르마—즉 업보에 대한 깨달음과 무소유의 실천을 강조하는 영적 체계입니다.

하지만 이번 시즌에서 불교의 영적 스승 ‘루앙 포 티라’가 내놓은 죽음에 대한 대답은 고작 ‘소멸’이 전부였습니다.


따라서 이번 시즌의 배경인 태국에서 제가 예상했던 사필귀정식 ‘카르마의 회전’은 자취를 감춰 버렸습니다.

그리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라는 무작위의 물리 법칙만이 둥둥 떠다니며, 결국 엉뚱한 곳에 총구를 겨누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이번 시즌이 남긴 건, 적자생존의 법칙과 돈과 성공만이 영속이라는 물질주의의 견고함 이었습니다.


불교의 나라에 ‘부처’는 없고 ‘니체’만 남은 상황에 처한 이들은 영적 욕구를 쾌락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시즌 5화에서는 그 극단을 보여준 인물인 릭(월튼 고긴스 扮)의 범죄자 동료였던 프랭크(샘 록웰 扮)의 독백을 들어볼 수 있습니다.

차마 여기에 옮길 수 없는 그의 변태적인 독백은 이번 시즌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동시에 가장 상징적인 순간으로 남습니다.


태국은 불교의 성지이면서 동시에, 보이레이디(트랜스젠더)를 포함한 독특한 성문화로 유명한 성매매 관광 도시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중성의 흐릿한 경계는 <화이트 로투스>에서 코사무이의 치유를 위한 ‘힐링’ 리조트를 둘러싸고 있는 일명 자살나무라고 불리는 독이 든 퐁퐁나무 열매와 원숭이의 상징성이 대변하고 있습니다.

구원과 유혹, 치유와 파괴의 경계가 모호한 그곳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들을 하게 될까요?

<화이트 로투스>의 이번 시즌 역시 전작과 마찬가지로 앤솔러지 형식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이전 시즌과의 연결고리를 놓지 않았습니다.

시즌 1에서 갑부 타냐(제니퍼 쿨리지 扮)의 사업 제안을 받고 끝내 물먹은 정신적인 피해자인 마사지사 ‘벨린다’와

시즌 2에서 타냐의 살해에 가담해 전 재산을 가로챈 타냐의 남편 ‘그렉’의 만남에는 타냐의 죽음을 두고 벌이는 씁쓸한 인간 군상의 흥정이 오고 갑니다.


하지만 이번 시즌에서 마이크 화이트가 무엇보다 이전 시즌과의 연결고리로 풀어내고 싶었던 것은 인물들 간의 관계가 아니라, 바로 ‘원숭이’였습니다.


시즌 1에서 마우이 리조트를 찾은 마크(스티브 잔 扮)는, 존경했던 아버지가 위선적인 이중생활 끝에 에이즈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충격에 빠집니다. 그리고 인간은 결국 원숭이(동물)에 불과하다는 씁쓸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이번 시즌은 바로 첫 시즌에서 보여준 바로 그 마크의 냉소적 통찰의 연장선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통찰은 이번 시즌 내내 화이트 로투스를 지배합니다.

그곳에 고상한 인간성과 영적 치유는 없었습니다. 그저 원숭이들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점에서 보면 40살 기념으로 자칭 ‘승리 여행’을 떠나온 세 친구 중 여행 내내 열등감에 휩싸였던 로리(개리 쿤 扮)가 마지막화에서 내뱉는 독백은 프랭크의 독백만큼 충격적이고 변태적인 고백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화이트 로투스>가 이번 시즌에서 가장 말하고 싶었던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다른 어떤것도 아닌 오직 시간만이 자신과 삶의 의미를 부여해 준다”는 그녀의 깨달음은 결국 마크의 인간은 원숭이에 불과할 뿐이라는 물질기반의 진화론적 성찰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화이트 로투스> 시즌 3은 이전 시즌들에 비해 분명 처진 인상을 줍니다. 시원하고 아름다웠던 자연 풍경은 습하고 음산한 기운으로 바뀌었고, 자연스럽게 녹아들던 사회적 담론들과 기막힌 반전들은 강박적으로 삽입되거나, 엉뚱한 다스베이더식 클리셰로 가슴에서 튕겨져 나갑니다.

특히 타냐(제니퍼 쿨리지 扮)의 부재는 이 시리즈가 그녀에게 얼마나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실감하게 만듭니다. 시즌 3의 공허함과 지루함은 이 시리즈에서 그녀의 지분이 그녀의 재산만큼이나 거대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 3은 <화이트 로투스>라는 시리즈의 정체성과 철학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낸 의미 있는 시즌입니다. 어쩌면 마이크 화이트는 그 철학에만 강박적으로 매달렸는지도 모릅니다.


그점에서 리조트의 경비원 가이톡은 직원의 서사가 약하다는 비판을 넘어선 철학적 은유가 되었습니다.

가이톡은 자신의 불교적 신념이었던 ‘살생금지’를 깨고 욕망의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그 선택의 동기에는 여인 무크(리사 扮)의 충동과 격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그는 리조트 사장의 경호원으로 승진하며, 시리즈 내내 한 번도 보이지 않던 ‘진짜 미소’를 짓습니다.


가이톡의 이 서사는 인간의 의식이 자라나 어떤 동기를 통해 의지와 욕망으로 바뀌고, 그로 인해 생기는 고통마저 회피하지 않고 운명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인간이 원숭이의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는 니체적 사유를 상징합니다.


몰락한 가장 티모시 역시 결국 고민 끝에 자신과 가족의 죽음을 택하는 대신, 고통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합니다.


그렇게 제가 본 <화이트 로투스>의 이번 시즌이 말하고자 했던 핵심은 명확했습니다.

‘적응’은 인간 진화가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이며, 종교는 때로 인간을 원숭이의 상태에 머물게 하는 가장 교묘한 ‘회피’의 장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앤솔러지 : 매 시즌 새로운 출연자와 새로운 이야기를 가지는 방식

**마이크 화이트 : <화이트 로투스>제작, 각본,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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