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드 러브'
약속 장소 '세컨드'의 풀 네임이다.
단순히 카페 사장님이 신승훈의 노래 '두 번째의 사랑'을 좋아해서 지어진 이름이었다.
"자기야. 나 여기 기분 나빠."
"왜?"
"이름이 세컨드 러브잖아. 자기 혹시 여기서 두 번째 여자 만나는 거 아냐? 나 차버리고?"
이럴 땐 대답을 잘 해야 한다.
그동안 이런 기습적인 질문들에 통수를 맞아 고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 난 좋은데? 어차피 내 두 번째 사랑도 정 여름 너니까"
사실 긴장이 좀 됐다.
급조한 대답이라 조목을 따지고들 경우에 대답하기가 곤란한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응? 진짜?"
그녀는 환한 미소를 띠며 흡족한 듯 보였다.
아마도 알듯 모를듯한 문장의 느낌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가끔 여자들은 멍청할 때가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나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다행히 우리 만남의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길 필요가 없어졌다. 난 우리 집에서 훨씬 가까운 이 장소를 사수함으로써, 앞으로도 계속 그녀보다 좀 더 여유 있게 약속 장소로 향할 수 있게 되었다.
가끔 우리가 자주 앉아있던 창가 쪽 자리가 찼을 땐 “아... 우리 자리에 누가 앉았네”라고 말하는 여름이의 표현이 웃기게 들리기도 했다.
'세상에 저기가 왜 우리 자리 인가?'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다.
난 “저긴 우리 자리가 아니라 사장님이 돈 주고 임대한 자리지”라고 말해주고 싶은 것을 몇 번 참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그녀와의 만남을 앞두고 난 그녀가 그 '우리 자리'에 앉아있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 자리가 왜 '우리 자리' 였는지, 난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멍청한 건 여자가 아니라 나였다.
나의 바람은 당연하다는 듯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음이 통한다'라는 건 그저 '마음이 통할 때만 통한다'라는 문장의 줄임말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 실망감도 곧 놀라움에 덮이고 말았다.
우리 자리에 앉아있는 여름이의 모습이 그 사이 많이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날개뼈를 포근하게 감쌌던 검정 생머리는 모두 돌돌 말려 목까지 올라가 있었던 데다, 입술을 칠한 붉은 립스틱을 머리까지 바른 듯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가정 폭력을 표현하고 싶은 건지, 멍처럼 퍼진 보라색 펄 아이섀도가 눈 주위에 흩어지며, 서예의 획처럼 날카로운 선으로 올라간 아이라인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긁으면 손톱 가득 벗겨 나올 것 만 같은 파운데이션은 봄날에 밀려온 황사처럼 그녀의 뽀얀 살결을 뒤덮어 버렸고, 그 뺨 위로 날아든 진달래 꽃잎처럼 연붉은 블러셔가 사뿐히 내려앉아 있었다.
목이 조일 것만 같은 와인색 폴라티 위로, 마치 5월의 따뜻함을 비웃는듯한 타이트하고 짧은 블랙 가죽 재킷이 그녀의 어깨와 팔을 조이며 질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퍼 스키니한 블랙 진은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그녀의 허벅지 사이즈를 정확히 체크하려는 재단사의 줄자처럼 틈이 없어 보였다.
눈대중으로 봐도 10센티는 되어 보이는 롱부츠의 힐은 그녀가 일어설 경우 나를 내려다보는 눈 높이를 가질 것이다.
허리춤에 달린 늘어진 금속 사슬과 부츠에 달린 여러 개의 작은 가죽 벨트의 금속들이 조명에 반사되어 날카롭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여름이의 옷들은 마치 그녀의 몸에 흡수되려는 듯 살을 파고들 것처럼 딱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의 작은 핸드백 안에는 담배와 총이 들어있을 것만 같았다.
’그 사이 뉴욕 파슨스 견학이라도 다녀온 것일까? 아니면, 브루클린 갱단에라도 가입한 걸까?’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녀는 너무 예뻤다.
난 홀린 듯 그녀의 신비한 변화를 관찰하며 천천히 그녀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카페에 김건모의 최신곡 ‘아름다운 이별‘이 흐르고 있음에도, 그녀가 이어폰으로 듣고 있던 노래의 볼륨이 어찌나 큰지, 옆에 다가갔을 때는 무슨 노래인지도 알 수 있었다.
그 노래는 내가 작년에 불태워버린 Nirvana의 앨범 'In Utero'의 수록곡 'Rape me'였다.
그것은 마치 나에게 어떤 '환생'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만 같았다.
내가 맞은편 자리에 앉고 나서야 그녀는 놀라서 이어폰을 빼며 나에게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어. 왔어? …”
잠시 후, 마치 여름이에게 한대 얻어맞은 듯이 얌전해진 알바생이 조신하게 메뉴판을 사뿐히 내려놓았다.
난 여름이가 좋아하는 헤이즐넛 커피를 시켰다.
여름이가 힐끗이 나를 한번 쳐다보곤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녀의 변한 모습들을 다시 한번 뜯어보고 있었다.
블랙과 레드의 코디는 마치 '죽음과 피'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앞으로 세상에 일어나게 될 참혹한 일들을 예고하는 티저처럼 느껴졌다.
"자기야… 잘 지냈어? … 연락 좀 해주지…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머리는 잘랐나 봐?"
내 심장은 처음으로 여름이의 팬티를 보던 때처럼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그땐 없었던 두려움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내 입술을 매우 떨리고 극도로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다리를 꼬고 창가 쪽으로 비스듬히 앉은 여름이는 초점이 없는듯한 눈으로 한참을 대답도 없이 창가를 쳐다보았다.
난 생전 처음 겪어보는 어쩔 줄 모르겠는 감정들을 추스르기 위해 커피를 들이켰다.
예상 못 한 순간적인 뜨거움은 기침처럼 참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 여름이와 같이 놓친 커피잔과 흘린 커피의 데자뷰가 스쳤다.
"어머! 자기야 괜찮아?!"
두 번째 데자뷰다.
옷이 더러워지는 것쯤은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무릎을 꿇고 내 몸에 흘린 커피를 급하게 닦아내는 여름이의 모습을 보면서, 왜 우리가 지금 헤어져야만 하는지 난 정말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괜찮아 자기야... 내가 할게... "
여름이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나 잠깐."
내 손에 손수건을 쥐여주곤 얼굴을 가리며 황급히 화장실로 달려가는 그녀의 힐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퍼졌다.
난 순간적인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그녀를 놀라게 했다는 것이 미안하게 느껴졌다.
자리를 정리하고 다시 앉은 나는,
그녀가 쳐다보았던 창문을 바라보았다.
‘여름이는 어디를 보고 있었던 것일까? ’
지난날 우리가 같은 소파에 앉아, 나의 가슴에 등을 기댄 채로 함께 바라보던 창문의 방향은 늘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아닌 것 같다.
다시 돌아온 그녀의 눈에는 아까 보았던 짙은 섀도와 라인이 지워지고, 비정상적으로 기다란 속눈썹도 더 이상 붙어있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나의 맞은편에 앉아 가볍게 아랫입술을 깨문 채로 자신만의 창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난 데인 입천장 때문에 잠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 새는 발음으로 어버버 거리는 모습까진 정말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난 왜 여름이가 저런 옷을 입었는지, 왜 나보다 키가 커지는 높은 하이힐을 신었는지, 왜 '우리 자리'에 앉았는지 이젠 모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기억 속에서 완전히 나를, 아니 우리를 지우려고 하는 것이다.
난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와,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내가 이대로 함께 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난 그녀가 몇 번이고 눈가에 고인 눈물을 삼켜내려 하늘을 쳐다보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아랫입술을 깨무는 윗니의 힘이 강해지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다짐이 섰다는 듯 정색을 하며 힘겹게 내 눈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먼저 깊은 숨을 들여마시고 입술을 열었을 때,
난 그만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울먹이며 그녀의 말을 막아섰다.
"가지 마..."
그녀의 벌어진 입술이 멈춘 채로 떨리기 시작했다.
"사랑해 여름아. 나... 제발 날 떠나지 마..."
그녀의 미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두 눈은 마치 출산의 고통을 미리 체험이라도 해 보려는 듯 심하게 찡그리며 무언가를 버티고 있는것처럼 보였다.
“내가 잘 할게 여름아. 방금도 커피 쏟아서 정말 미안해. 내가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여름이의 눈 속에서 얼어붙은 냇물이 녹아내렸다.
그녀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서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받아냈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나에게서 떠나갔다.
강하게 열린 입구 유리문이 미처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흔들렸다. 우리의 관계가 끝났음을 알리려는듯 처마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잠시 후, 난 마치 신데렐라처럼 그렇게 떠나버린 그녀의 하이힐 한 짝이 어딘가에 벗겨져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여름이가 신고 있던 건 잡아당겨도 잘 벗겨지지 않는 롱부츠였다.
마치 호박마차를 대기시킨듯한 모습의 알바생의 슬픈 눈빛이 나를 동정하고 있는 듯 보였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충격을 급하게 완충하려는 판타지가 스프링처럼 튀어나와 나의 뇌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카페에 드비쉬의 ‘달빛’이 흐르기 시작했다.
겨울이 병문안에서 봤던 여름이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때의 피아노 같았던 그녀의 검은 머리와 아이보리색 니트의 출렁임이 창가에 비추었다.
오늘 그녀의 파격적인 모습과 달리, 우리의 이별에 반전같은 것은 없었다.
30분쯤이나 지났을까. 처마종 소리와 함께 팔짱을 꼭 끼고 사랑스러운 미소와 함께 입구를 들어서는 한 커플이 보였다.
난 마지막으로 여름이가 앉았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우리 자리'를 그들에게 내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