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요. 손님? 이거... "
카운터 위의 메모판에 붙은 커피숍 오픈 1주년 기념행사에 당첨이라도 된 모양이다.
‘하필 이별한 날에 당첨이라니…‘
알바생이 전해주는 조그만 선물상자에 그만 '피식'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됐어요. 그냥 다른 사람 주세요."
"... 손님. 아까 뛰쳐나간 그분이 손님 나갈 때 꼭 전해주라고 부탁해서요... "
아주 잠깐 흐른 정적 탓에 알바생의 손이 민망해지고 있었다.
이젠 나와 여름이의 사랑과 이별까지 모두 지켜본 이 알바생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느껴졌다.
"아. 네... 감사합니다."
난 얼른 선물상자를 건네받곤 밖으로 나와 10미터쯤 걸어가다 말고 뒤돌아 커피숍을 쳐다보았다.
나와 여름이 대신 창가 쪽 우리 자리에 앉아있는 커플들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너희들도 언젠간 나와 같은 일을 겪게 되겠지?... 반드시!'
사람들은 서로를 비추는 슬픈 거울을 있는 힘껏 깨트려보려 하지만, 그럴수록 더 단단한 거울 속에 갇혀갈 뿐이다.
이 작은 커피점에 남긴 우리의 이별짓이 나비효과를 일으켜, 모든 커피전문점에서 연인들의 싸움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상상을 하며 걸었다.
그렇게 버스 정류장이 보이는 찻길까지 걸어 나왔을 때야 비로소, 내 걸음에 맞추어 박자를 반복하던 주머니 속 상자의 소리가 거슬렸다.
상자를 꺼내어 정성껏 두른 포장지를 손톱으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금색 줄에 매달린 작은 주머니 시계 펜던트와, 반이 접힌 하얀 메모지 한 장.
'오늘 밤 12시가 되면 우리에게 걸려있던 모든 마법이 풀리게 될 거야.
날 기억하지 마.
안녕.'
난 정말이지, 그 순간만큼은 그녀가 대학생인지 의심스러웠다.
언젠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오즈의 마법사'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 낸 것이 그나마 이 문장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내가 그로부터 2년 후 조엔 K. 롤링의 '해리 포터' 가 일으킨 글로벌 열풍을 비웃었던 이유도 순전히 그녀가 내게 남긴 이 마지막 메모 때문이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손가락에 목걸이를 걸어 허공으로 들어 올려 멍하니 쳐다보았다.
마침 앞에 있는 서점 쇼윈도가 그런 나를 비추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가판대에 전시되어 있는 시드니 셀던의 책 제목이, 쇼윈도를 넘어 바라보는 반투명한 내 가슴에 들어왔다.
'영원한 것은 없다.'
삐삐삐삐. 삐삐삐삐. 삐삐...
또다시 삐삐로프의 개가 되어 급히 찾은 공중전화에는, 먼저 온 여자가 통화 중이었다.
[스마트폰 문화의 좋은 것 중 하나는 이렇게 공중전화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종일 수화기만 붙잡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살인 충동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어 오빠. 뒤에 사람 기다려서 더 못하겠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따 만나서 해. 어~ 끊어~"
20분을 통화한 후 기다리던 나와 마주친 그녀의 눈빛은, 마치 대단한 배려심을 내보인 자신이 뿌듯하다고 느꼈는지, 나에게 고맙다는 대답을 요구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여자를 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야. 다 만났냐? 나 기섭인데, 택시 타고 강남 사파리 호텔 나이트 가자고 해.
넌 나이가 안되니까 그냥 거기 기도형한테 웨이터 돼지엄마 찾으면, 걔가 알아서 해줄 거야…
그리고, 올 때 편의점 가서 담배 두 갑이랑 양주 하나만 사서 가방에 넣고 몰래 가지고 들어와 봐. 아! 너 미성년자지? 씨발.
넌 되는 게 뭐야 대체!
…일단 시도해 보고 안 되면 할 수 없고. 하여튼 거금 써서 룸까지 잡았으니까 꼭 와라 씨발."
여름이의 메시지일 거라는 기대를 안 했다면 거짓말이기에 내 마음은 뚱보가 앉은 싸구려 소파처럼 푹 꺼졌다.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어요?"
"안 가져왔는데요?"
"네. 여기 잔돈이요."
“수고하세요.”
내 연기가 너무 자연스러웠을까?
아니면, 내가 이 사회에서는 생각보다 ‘노안‘일 수도 있다. 난 그저 우물 안 개구리였을 뿐이니까.
’불법‘은 가슴 뛰게 만든다.
’죄’는 중독성이 있다.
돼지엄마를 따라 들어간 사파리 나이트클럽은 어지러운 곳이었다.
신나는 음악. 쉴 새 없이 반짝이는 조명들. 짙은 화장의 이리저리 웨이터 손에 끌려다니는 여자들. 여자 가슴에 손을 넣어보려는 남자들. 자욱한 담배연기. 무대 위 유명 개그맨의 섹드립. 흔들리는 살덩이. 서로 먹잇감을 유인하기 위해 본색을 숨긴 사람들의 치열하게 밀고 당기는 혀들이 낼름대는 그곳은 활기가 넘쳐났다.
"오! 드디어 우리 강퇴당한 회원께서 다시 돌아왔구만!… 자자 여긴 내 친구 여정이라고 방금 미친 순정만화 판타지에서 빠져나온 분이시니까 너희들은 술 그만 처먹고 이제 얼른 나가봐."
"아 뭐야. 이 오빠 딱 내 스타일인데~"
"빽! 시끄럽고 웨이러~!"
돼지엄마의 귀에다 뭐라고 속닥거린 기섭이는 이내 지갑에서 꺼낸 수표 한 장을 돼지엄마의 윗주머니에 꽂았다.
"걱정 마세요 형. 내가 책임지고 될 때까지 조달하겠음"
둘의 모종의 거래가 끝난 뒤, 돼지엄마의 손에 이끌려 쉴 틈 없이 여자들이 들락거렸다.
난 사파리 나이트클럽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곳으로 찾아온 모든 동물들을 다 구경한 것만 같았다.
술기운이 올라오자 부끄러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던 내 입술이, 점점 뇌를 거치지 않은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저기. 당근 좋아하세요?"
"네?... 호호호. 왜요 제가 토끼 같아 보여요?"
"아뇨. 말하고 닮아서요. 한번 올라타 봐도 될까요? 킥킥킥. "
"뭐 이런 또라이가 다 있어! 병신같이 생겨가지고 진짜!"
짝!!!
싸대기를 맞는 경쾌한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야 이 변태 새끼야! 어딜 만져! 오빠!"
지나가던 돼지엄마가 황급히 들어와 기섭이 따귀를 갈긴 여자를 끌고 룸 밖으로 나가 달래주는 모습이 보였다.
"아. 형. 좀 사람 봐가면서 건드려요. 기도 귀에까지 들어가면 저도 더 이상 어떻게 못해요."
"어. 그래 미안하다."
우린 기분 전환 겸 스테이지에 나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 흘러나오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마치 모두들 이곳에서 잘못된 만남을 갖길 간절히 원하는 것만 같았다.
이곳은 마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자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같은 곳이었다.
옆에서 떨어져 춤을 추고 있던 붉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느새 그녀와 나는 키스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그녀는 나를 홀리듯 올려다보며 천천히 허리를 흔들고, 한 손으로는 기 치료를 하듯 내 몸을 허공에서 쓸어내렸다.
바닐라 아이스의 ‘ice baby’로 음악이 바뀌자 그녀의 움직임이 좀 더 관능적으로 변했다.
점점 더 밀착되는 그녀의 몸 어딘가에 나의 중심이 닿자, 그만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손이 나가 그녀를 밀쳐냈다.
“꺅!”
중심을 잃고 나자빠진 그녀와 함께, 주위 사람들도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며 짧은 비명을 질렀다.
찌익—디제이의 LP 스크래치 소리와 함께 음악이 뚝 끊겼다.
갑작스러운 침묵 속에서 천장의 미러볼만이 회전하며 조명을 튕겨내고 있었다.
자빠진 여자의 벌어진 두 다리 사이로 훤히 드러난 하얀색 팬티가 조명을 받아 번쩍였다.
순간, 지난날 병원에서 자빠졌던 여름이의 그것이 스쳐갔다.
멍하니 서 있던 내 어깨를 누군가 강하게 밀쳐내는 바람에, 나 역시 20센티 높이의 스테이지 끝에서 떨어져 자빠졌다. 아마도 그녀와 친분이 있던지, 아니면 친분이 있고 싶어 하는 놈의 시비였을 것이다.
조명과 술기운에 시야는 흐릿했지만, 아마 그녀는 상당히 예뻤던 모양이다.
"이런 씹세끼가!"
쏜살같이 달려나가며 자신의 시그니처 날아 차기를 시전하는 기섭이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비명소리가 더 거세졌다.
일대 한바탕 싸움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난 당장이라도 속을 쏟아낼 것 같아 일어나 비틀거리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우웩! 우웩!"
내장을 다 쏟아낼 것처럼 토사물들이 땅에 떨어졌다.
정신은 좀 나아졌지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하늘을 보니 도시 조명에 별은 지고, 찌그러진 만두 같은 달만 나를 비추고 있었다.
나는 잠시 쭈그려 앉아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늦은 밤에도 사파리 클럽을 향하는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모두 어떤 기대감이 가득해 보였다.
이성친구를 만들거나, 하룻밤 엔조이를 하거나, 뭐가 됐든 그들 중 대부분은 허탈함과 씁쓸함만을 가지고 저곳을 빠져나올 것이다.
그리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같은 기대감을 얼굴에 담고 내일도 모레도 저 심연으로 이어질 것만 같은 컴컴하고 좁은 계단을 밟아 들어간다.
그중 몇 명은 점점 진화하는 자신의 말발을 떡밥 삼아 낚아올린 성(性) 경험담을 그럴듯한 제목의 책으로 출간하여, 남녀의 성(性) 적 사고를 획일화하는 편견을 퍼트릴지도 모른다.
침대에서 느끼는 여자들의 오르가즘이 상당 부분 거짓인 것을 부정한 채, 단지 혼자서 끝내주는 관계를 제공했다는 착각과 그것으로 여자의 모든 것을 안다는 멍청한 성취감에 취해 비틀거린다.
"야. 빨리 타."
조수석 문을 열며, 클락션을 울리는 기섭이의 얼굴은 멍들고 부어 있었다.
"어... 야. 근데 너 괜찮냐?"
"졸라 패고 왔지 씨발. 좆밥새끼가 졸라 빌길래 봐주고 그냥 나왔다."
"누가 봐도 졸라 처맞은 얼굴이야 지금 너."
"야. 그 새끼 친구들도 있더라구 씨발. 기습적으로 몇 대 맞은 거지. 지금 그 새끼들 땜에 응급차 불렀어."
"방금, 빌어서 그냥 나왔다며?"
"아. 시끄러 병신아! 운전하는데 말 시키지 마!"
난 그제야 기섭이가 마신 술의 양을 떠올리고, 잽싸게 안전벨트를 매고 손잡이를 꼭 잡았다.
"야... 좀 천천히 가자... "
"씨발 야. 걱정 마 안 죽어.
죽을 거면 지금 집 마당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어도 벼락 처맞아 죽는 거야."
"사고 나서 병신 될 순 있잖아. 개새끼야."
기섭이는 우리 집 앞에 나를 내려주고, 후진을 하다 사이드 미러가 전봇대에 빡! 부딪혀 박살이 났다.
"씨발 국산차! 아빠한테 뒤졌네 이제!"
"야. 미안하다... 나 때문에... "
"야 됐고. 너 너무 니 속에 갇혀 살지 마. 씨발 남자고 여자고 사람은 조올라 많어.
사랑? 야. 좆 까라그래. 나이트에서 봤잖아. 니가 지금 씨발 아무리 진실 뭐 그딴 거 혼자 간직해 봤자 너만 손해야 병신아. 어차피 내가 안 따 먹으면 누군가 따먹… "
기섭이는 지난번 그 말 때문에 싸운 걸 문득 떠올렸는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이번엔 그 말이 그저 웃기기만 했다.
"킥킥킥. 뭘 따먹어 병신아. 여자가 씨발 무슨 캔커피냐?"
또 또, 캔커피를 품에 안고 있던 여름이 생각이 났다.
난 ‘진절머리‘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여튼말야. 적당히 즐겨 그냥. 이 형님 말 명심해라. 그럼 간다."
난 아무래도 숙취로 속이 싸-한 느낌 때문에 라면이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집으로 들어가려던 발길을 돌려, 좀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엄마가 잠들어있을 시간에 달그락 거리다간 또 잔소리를 듣게 될 터였다.
거기다 절대로 술 냄새나 술 취한 모습을 엄마 앞에 보이지 않겠다는 다짐도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조금이라도 더 술을 깨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