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메아리

by 스투키


15분쯤 걸어 교차로 안쪽에 있는 페밀리 마트에서 육개장 사발면 하나를 사서, 물을 붓고 편의점 앞 파라솔 테이블에 사발면을 올려놓고 기다렸다.

최신형 검은색 아반떼 차량이 들어와 편의점 앞에서 잠시 정차했을 때만 하더라도, 난 아무 생각 없이 서서 나무젓가락을 둘로 쪼개어 비비며, 가시들을 걷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조수석에서 사이드미러를 보며이 화장을 고치고 있는 여자가 여름이라는 것을 확인했을 땐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녀의 귀에는 한번도 빼낸적이 없을것 같은 이어폰이 꼽혀 있었다.


편의점 문을 열고 나온 한 청년의 손에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이내 운전석에 올라 여름이에게 봉투를 건네는 모습이 보였고, 곧이어 시동이 걸렸다.

난 심장이 너무 뛴 나머지 머리가 다시 어지럽기 시작해, 한 팔로 의자의 등받이를 잡고 몸무게를 지탱하고 서 있었다.

그런데, 여름이를 싣고 출발한 차량이 나의 시력을 채 벗어나지 못한 시점에서 차도로 진입하지 않고 좌회전을 꺾어 들어갔다.


그 순간, 정말로 난 심장에서 쿵 소리를 들었다.

나의 뇌가 모든 기능을 멈추자,

눈은 초점을 잃고, 몸은 중심을 잃었다.

난 잡고 있던 의자와 함께 길바닥에 내동댕이 쳐졌지만, 전혀 아픔도 느낄 수 없었다.

편의점 알바생이 뛰어나와 급하게 의자를 일으켜 세웠다.

나에게도 뭐라 뭐라 하는 것 같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 라면이 다 익었다는 소리였을까?‘


난 나자빠진 채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반짝이는 네온간판에 망막이 진동했다.


'람세스 모텔'


잠시 후, 간판에서 조금 떨어진 6층쯤 되는 창문에 불이 켜졌다. 난 그때까지도 일어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차량의 경적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길을 막고 누워있는 나를 향한 운전사의 화난 손짓이 보였다.


난 일어나 모텔의 6층 창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내 발이 모텔 앞에 멈추어 섰을 때, 자위행위를 하다가 본능적으로 엄마의 인기척을 느끼고 급히 자는척하는 기섭이의 방처럼, 불이 꺼졌다.


”어차피 내가 안 따 먹으면 누군가 따먹... “


조금 전, 기섭이가 한 말이 환청처럼 귓가에 울렸다.


환청을 뚫고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스며들었다.

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또 아무것도 없었다.

반복되는 멜로디의 근원지를 알아차렸을 때, 난 주머니에 손을 넣어 여름이가 준 목걸이를 꺼냈다.

같이 끌려 나온 하얀 메모지가 봄바람에 날려 가을 낙엽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난 짧은 메모의 내용을 머릿속에 되뇌었다.


'오늘 밤 12시가 되면, 이제 우리에게 걸려있던 모든 마법이 풀리게 될 거야. 날 기억하지 마. 안녕.'


설마 하고 목걸이에 달린 작은 주머니 시계의 뚜껑을 열어보았다.

12시다.


나는 마치 여름이가 쓴 섹스 판타지 인형극에 매달린 마리오네트가 된 것처럼 그녀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대로 움직이고 있는것 같았다.

그녀의 인생을 스쳐 지나가는, 한낱 엑스트라 조연쯤으로.


주머니 시계 윗부분을 누르자 미세한 ‘딸깍‘ 소리와 함께 음악이 멈췄다. 여름이가 비디오방에서 혼자 풀었던 브래지어 후크 소리가 떠올랐다.

생각보다 비싼 목걸이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자세히 들여다보니 'MADE IN SWISS'라는 문구가 보였다.


페밀리 마트의 파라솔 테이블 위엔 불어 터진 라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관우는 차가 식기 전에 화웅의 목을 베어버렸다는데, 난 라면이 불어 터질 때까지 뭘 했던 것일까?

뚜껑을 열어 한껏 국물을 흡수한 퉁퉁한 면발들을 보자,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왜 눈물이 나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난 슬프지도, 그녀가 원망스럽지도, 자빠지면서 까진 손바닥이 아프지도 않았다.

그런데, 가슴속이 너무 아팠다. 정확히 위치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다.

어릴 적 여름에 계곡에 놀러 가 벌에 몇 번이나 쏘였을 때 보다 더 아팠다.

쏟아지는 눈물을 네덜란드 소년처럼 있는 힘껏 막아보려 했지만, 주먹으로 물을 쥔 듯 새어 나왔다.

난 라면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람세스 모텔이 보이지 않을 곳까지 있는 힘껏 뛰었다.

동네 놀이터까지 뛰어왔을 때야 비로소 난, 숨 막히듯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씨발! 좆같은 세상!"


작년 끝자락에 겨울이가 뒷산에서 내뱉은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내게로 돌아왔다.


만약에 지구를 일초에 일곱 바퀴 반만 돌 수 있다면, 시간을 멈출 수 있다던 아인슈타인이 원망스러웠다.

그놈의 if 절 때문에 고통 속에 허우적대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은 아무도 지려고 하지 않는다.

저렇게 아무 남자에게나 다리를 벌리는 여자에게, 만약에라도 나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다면, 이라는 간절한 가정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난 왜 안되냐고! 나도 씨발 할 줄 안다구 개년아!”


눈물이 마를 때까지 얼마큼의 시간이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내어 보니 새벽 2시 28분이었다.

여름이 덕분에 난 사람이 1시간 이상 키스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이어, 또 2시간 이상 울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마도 그녀는 오늘 사람이 하루에 몇 번이나 섹스를 할 수 있는지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나보다 우월한 여자였다. 지능도, 학력도, 외모도, 어휘력도, 인기도, 재산도, 사회성도, 거친 숨소리도, 섹스도.


조심스레 현관을 열고, 까치발을 들어 내 방으로 향했다.

어느새 아프던 머리가 깨끗이 나아 있었다.

방문을 열고, 불을 켜기 전에 지갑을 꺼내어 여름이와 찍었던 단 한 장의 사진을 찢어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리고 불을 켜 보니 책상 위의 메모가 눈에 띄었다.


'엄마 부산 이모 입원했다고 해서 다녀온다. 밥 잘 챙겨 먹고, 학원 빼먹지 말고, 돈은 서랍 속에 넣었다. 전화해라.'


도대체, 정말로 필연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난 굳이 라면을 사 먹으러 편의점까지 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후. 난 며칠 동안이나 악몽에 시달렸다.

여름이가 얼굴을 기억할 수 없는 남자 둘과 쓰리썸을 하며 나를 쳐다보고 비웃었다.

어느 날은 섹시한 잠옷을 걸치고 채찍으로 날 내리치곤, 쓰러진 내 앞에서 또 잠옷을 내리며 다른 남자에게 걸어가 요상한 몸짓을 보여주기도 했다.

깨고 나면 속옷이 찝찝하게 젖어있기도 했다.

요 며칠 기섭이에게 빌린 포르노 비디오의 영향인듯싶었다.

기섭이는 몇 번 나에게 사창가를 권유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여름이가 가지고 있던 내 동정의 권리가 해제된 이상 문제 될 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매춘부로부터 내 성생활을 시작하고 싶진 않았다.


난 점점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지만, 기섭이가 친해진 문과 재수생들과도 어울려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당구 실력에 비해 성적은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가끔씩 기섭이가 문과반에서 꼬신 여자들을 소개해 주긴 했지만, 난 눈도 잘 마주치질 않았다. 아마도 내 마음속 어딘가에 여자를 향한 불신이 심어져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건 핑계일 뿐이었다. 여름이를 만난 이후 내 눈은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었기 때문에 단지 성에 차지 않았을 뿐이다.

일단 재수생들은 다 애송이처럼 보였다.

어느새 자리 잡은 나의 여성관은 점점 섹시함을 지향하게 되었다.


어느 날, 기섭이가 자주 가는 커피전문점에서 테이블마다 놓여있는 전화기를 이용해 이리저리 장난전화를 걸며 키득 거리고 있었다.

기섭이가 입수한 여고 졸업앨범에서 전화번호를 확보한 후 우리는 괜찮아 보이는 여자들의 집에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어. 나야. 잘 지냈어?'라는 말을 던지고 반응을 살폈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누구세요?'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가끔씩 '어. 웬일이야.' 나, 더 나아가서 '어. 왜 그동안 연락이 없었어?'의 반응을 보일 때가 있었다.


우리는 그런 여자들과 거짓으로 약속 장소를 이곳으로 잡았다. 그리고 도착한 여자들이 오지 않을 상대를 기다리다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그중 어떤 여자는 기다리다가 확인 전화를 걸어 거짓인 것이 확인되자 울기도 했다. 아마도 우리의 목소리를 헤어진 남자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우린 생각보다 더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곧 그만두었다.


“너 혹시 여정이 아니니?“


웬 여자가 뜬금없이 건네는 인사에, 난 장난전화를 들킨 줄 알고 겁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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