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미실이

by 스투키


"너 혹시 여정이 아니니?"


"네? 아... 아닌데요?"


"에이 맞잖아. 뭐가 아니야?

나 기억 안 나? 여름이랑 잠깐 같이 봤었는데."


느닷없이 여름이라는 이름이 망치가 되어 뒤통수를 때렸다.


그러고 보니 여름이가 카페에서 베스트 프렌드라며 소개해 준 여자애가 있었다.

그땐 여름이와의 관계가 관능적으로 치닫고 있었던 터라, 예고 없이 나타난 친구는 그저 불청객처럼 느껴져 기억에 제대로 저장되지 않았다.


"어. 어... 그래... 이름이...?"


"풋. 그때도 몇 번이나 물어보더니. 미실이야 나 미실."


"어허... 그래. 너. 미실이구나."


"호호호. 그래 나 미실이다. 너한테 할 말 있어서 몇 번이나 세컨드에 갔었는데,

여기로 옮겼나 보네?"


"나를?"


우리를 지켜보던 기섭이의 눈이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엔 관심이 없었지만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그녀에게 차분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저 여정이 친구 기섭이라고 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저기 괜찮으시면 같이 앉아서 이야기하셔도 되는데요."


기섭이의 ’나 얘 좋아‘센서가 작동됐다.


"아. 아니에요. 친구랑 같이 와서요.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저기. 친구분이랑 이쪽에 오셔서 같이 이야기하셔도 되는데... "


"아. 저희 이제 일어나서 어디 좀 가야 할 곳이 있어서요.

그럼 여정아. 언제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어? 어... 그래 언제?"


"내일 저녁 어때? 일곱시에 여기서 좀 보자."


"내일?... 그... 그래... "


"그럼 내일 봐. 또 봐요 기섭 씨."


"네... 꼭요... "


미소를 띠며 자리를 떠난 그녀 등 뒤로 내 멱살이 기섭이의 손에 잡혔다.


"야! 나 저 여자 소개시켜줘. 씨발 졸라 내 스타일이야."


"켁켁. 나도 잘 모르는 애야 병신아."


"내일 만나자잖아. 씨발 니가 좋은데 그동안 여름인가 걔 때문에 말 못 했나 부네. 넌 씨발 내일 무슨 일이 있어도 거절해."


"뭘 거절해 병신아. 말도 못 들어 봤는데."


"뻔한 거 아냐. 고백 할라구 그러는 거지.

근데 이렇게 좆같이 생긴 새끼가 뭐가 좋다고 여자들이 달라붙는 거지?"


"미친 새끼. 넌 뭐가 맨날 뻔해. 일단 이야기나 들어보구."


"야! 너 씨발. 그날 내가 나이트 룸비 합해서 62만 원에 새꺄! 졸라 얻어터지... 아니 아니. 엄마카드 걸려서… 아니아니… 아빠 차 백미러 뿌셔져서 졸라 얻어터졌다고. 암튼 내가 널 위해서 그렇게 내가 여자 만나게 해줄려고 노력했는데, 여자 하나 양보 못하냐?!"


뭔가 말이 앞뒤가 엉성해 보였다.


"알았어. 알았으니 아까 그 내가 좆같이 생겼다는 말부터 취소해라. 아무리 그래도 친구한테 좆같이 생겼다는 건 뭐냐?"


“아… 그건 새꺄. 존나 잘생겼다를 격하게 표현하다 보니까 나온 거지. 이긍~ 다 알면썽?”


“오케이. 미실이 쟤. 어차피 내 스타일도 아니야.”


그건 사실이었다.

스타일을 떠나 여름이는 쉽게 바뀔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직 그렇게 쉽게 그녀를 잊을 수 있을 만큼, 그녀를 덜 사랑하지 않았다.

거기다 생각해 보면 난 순결 지상 주위도 아니었다. 그날의 충격 때문에 잠시 가치관이 순결에 쏠려있는 듯이 혼란에 빠지긴 했지만, 난 늘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이야기해 왔다.


"야. 뭐 경험 있으면 어떠냐? 현재 사랑이 중요하지."


"야. 저 새끼 사창가 절대 데리고 가지 마라 기섭아. 저런 새끼가 나중에 씨발 꼭 그런 데서 여자 빼내야 된다고, 포주한테 줄 돈 필요하다고 몰래 집문서 팔고 개지랄 떨다 다 털리고 맞아 죽는다."


미실이가 카페에 들어선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어서 와~"


난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앉아 있는 테이블 위의 레모네이드 유리잔에는 아직 한 번도 물리지 않은 빨대가 바닥을 찾지 못하고 떠 있었다.

난 맞은편 자리에 앉아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지난번 입 천장이 데인 이후로 나의 모든 음료 주문은 아이스로 바뀌었다.


"밥은 먹었니?"


"어?... 어... 먹었어. 너는?"


"어... 난 아직... 사실. 조금 긴장이 돼서... "


느낌이 왔다. 설마설마했지만 역시 기섭이의 말이 맞았다. 생각해 보면 기섭이 말이 대부분 다 맞았다.

나도 이제 더 이상 숙맥도 초보자도 아니었기에 여자들의 간접화법 스킬 따윈 여지없이 나의 레이더에 포착된다. 이래서 경험이 중요한 것이다.

굳이 긴장을 말로 표현한다는 건, 나를 보고 설렌다는 신호다.


친구의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참 힘겨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보내왔지만, 내가 자리에 앉은 이후 미실이의 레모네이드는 그녀가 휘젓는 빨대로 인해 넘쳐흐를 듯 회오리치고 있었다.


나는 여름이와 헤어진 날의 커피에 복수라도 하듯 아이스커피를 쭉 들이키며, 미실이와 만났던 날을 기억해 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저기. 여정아 있잖아... 그… "


미실이가 말꼬리를 흐리며, 어물쩡거리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다시 만남을 갖기까지는 용기를 냈는데, 막상 고백을 하려니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고개를 들었을 것이다.

난 그녀가 안쓰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고백을 거절당할 때의 기분을 경험한 적은 없어도, 그보다 더 아픈 이별을 경험해 본 나로선 그런 아픔의 모형조차도 전해주고 싶지 않았다.


물론, 우리가 사귄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때의 기억은 없지만, 다시 만나게 된 그녀는 아담하고 단아한 느낌을 주었고, 무엇보다 여름이처럼 쾌락에 미쳐 살지도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직 다 식지도 않은 마음에 다른 여자를 품는다는 건 옳지 않다.

거기다 친구인 기섭이의 간절한 애원 또한 모른척할 수만은 없었다.


난 최소한 그녀의 자존심은 지켜주고 싶었다.

적어도 그녀가 고백의 말이라도 뱉지 않는다면 조금은 덜 상처가 되리라.

난 미실이의 말을 잘랐다.


"저기... 있잖아. 미실아. "


"응?"


"내가 사실... 너도 알다시피 여름이랑 헤어진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또 아직은 재수생이라 공부도 해야 되고... 니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닌데, 그래도 사람 마음이란 게... "


그녀의 레모네이드를 휘젓던 손이 멈추었다.


‘그래. 미실이 너에겐 지금 이 순간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겠지.’


나의 잔인한 혀는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지금 결단을 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그녀의 저 착한 눈을 더 이상 외면하긴 힘들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저기 뭐냐... 어제 니가 봤던 내 친구 있지? 기섭이라고. 걔가 사실 보기엔 좀 껄렁해 보여도 진짜 순진한 애거든... 그 애가 너를 되게 만나고 싶어 하더라 생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지난번 수능 때 그놈이 시험 치러 가다가 사고를 당해서 그렇지. 공부도 잘하는 놈이고, 운전도 할 줄 알고, 그 또 뭐지... "


난 기섭이의 지령 중에 빠트린 것이 없나 다시 한번 되뇌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실연을 실감했는지 고개를 떨구었다.

뭔가 체념한듯 그녀의 레모네이드는 우리가 만난 지 20분이 지난 지금에야 빨대를 입에 문 그녀의 빨간 립스틱을 통과해 들어갔다.

그녀가 빨아들이는 음료가 곧 눈물로 정제되어 떨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설령 그녀가 저 음료를 내 얼굴에 집어던진다 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이란 감정은 이성을 마비시키기도 하니까.


그런데, 예상과 달리 그녀의 레모네이드는 눈이 아니라 들어갔던 입에서 다시 뿜어져 나왔다.


"풉... 어머! 미안."


그녀는 잽싸게 레모네이드를 받치고 있던 냅킨을 집어 들어 자신의 입을 닦고서는, 마치 지금 이 순간 입에서 뭔가 튀어나온 일이 없다는 듯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여정이 너. 왕자병 있구나?"


"어?"


"근데 어쩌지. 나 남자친구 있는데. 왜 그때 기억 안 나? 우리 헤어질 때 나 데리러 와서 잠깐 인사했는데. 호호호."


"어? 어... 그래... 그랬지 맞어…. 근데, 그랬어?"


"호호호. 어머. 너 그리고 내 스타일도 아니야 얘."


그녀의 웃음소리가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얼굴이 조금씩 달아오는 것을 느낀 나는 그것을 식히기라도 할 듯 나머지 커피를 한 번에 들이 마셨다.

미처 다 녹지 못한 작은 얼음조각을 씹다가 그만 혀를 깨물고 말았다.


"으읍!"


"어머! 야. 괜찮니?!"


빌어먹을.

난 왜 자꾸 여자들에게 같은 소리를 듣는 걸까?

난 고개를 숙인 채 손짓으로 괜찮다는 의사 표현을 전했다.


"어... 저기... 그게 아니라... 니가 나를 꼭 만나고 싶어 했다고 하길래... 그럼. 나한테 무슨... "


"아...! 어... 그게 저기... "


그녀는 또 잠시 망설이며, 이번에는 유리잔의 빨대를 탁자에 빼놓고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뭔가 결심한 듯 정색하며 잔을 내려놓았다.


"저기 있잖아... 여정아. 사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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