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원점(原點)

by 스투키


터벅터벅 걷다 보니 어느새 겨울이의 집 앞에 닿아 있었다.

2층, 여름이의 방 창문에는 희미한 달빛이 비치고 있었고, 그 속에 커튼의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문득, 예전에 본 미국 드라마 ‘캐빈은 12살’에서,

주인공 캐빈이 여자친구 위니의 집 지붕 위로 몰래 올라가, 창문 너머로 상처 입은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던 장면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장면은 마당에 담이 없는 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나라 단독주택의 높은 담벼락과 섬뜩한 쇠창살 구조는 낭만을 이야기하기엔 영 빵점이었다.


도대체 이런 경우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리저리 거리를 배회해 보지만, 그 방황에도 뚜렷한 이유나 목적은 없었다.

가슴은 답답하고, 기운은 없고, 발걸음만 이리저리 떠도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주는 이정표는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이렇게 마지막 담배를 피울 때쯤이 되어서야 비로소 담배를 살 수 있는 ‘편의점’이라는 목적지를 인식할 뿐이었다.


‘그때 버렸던 불어 터진 라면은 지금쯤 난지도에 묻혔을까?’


내 머릿속은, 마치 봄날의 불어오는 황사에 먼지가 쌓인 거울처럼 희미하고 몽롱한 상상들을 달빛에 반사하고 있었다.

편의점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지금 내가 걷는 이 길에 러닝머신이 놓인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그저 멀리서 편의점이라는 목적지를 바라보며 언제까지 하염없이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그 순간, 왜 경주견들이 트랙 위에서, 잡을 수 없는 먹이를 향해 그렇게 내달리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난 지금 그저 일차원적인 본능에 사로잡힌 동물이나, 세 살 베기 아이가 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살수만은 없었다.

세상은 그렇게 살도록 나를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내 앞에, 조금씩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까만 아반떼 차량의 모습이 보이는 것처럼.


반드시 범죄현장을 다시 찾는다는 범인들의 일반적 속성을 증명하듯이, 편의점 앞에 주차해 있는 검정 아반떼 차량의 번호판까지 눈에 들어왔을 때,

난 그만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생각해 보니 실질적인 범행 현장은 이곳이 아니긴 했다.


조수석 문이 벌컥 열리며 여름이가 내렸다.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곧이어 운전석에서 그놈이 따라 내렸다.

그는 재빨리 여름이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았고, 그 일련의 움직임들이 주위 엑스트라들 같은 몇몇 행인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둘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마치 무대 위에서 대사를 주고받는 배우들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곧, 남자가 두 손을 들어 차 지붕을 거칠게 내리치며 긴장감이 한순간에 폭발했다.

그놈과 함께 내 심장도 요동쳤고, 그 속에서 꿈틀거리는 감정의 정체는 아직 분명치 않았다.


하지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어둠 속으로 뛰쳐나가 사라지는 여름이의 모습을 본 순간, 비로소 깨달았다.

지금 내 안을 뒤흔들고 있는 건, 100퍼센트 분노였다.

그리고 곧 잃어버린 이성이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내달리고 있었다.


그놈이 다시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빡!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달려든 내 오른발이 사이드미러를 박살 내버렸다.

화들짝 놀란 놈의 반질한 얼굴이 그대로 내 눈에 들어왔다.


“뭐야 씨발!”


놈이 급히 앞문을 열고 나오려고 했다. 나는 재빨리 그 문을 강하게 발바닥으로 걷어 찼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이 충격을 받은 사이, 열린 차창 너머로 내 발이 세차게 날아들었다.

정통으로 얼굴을 처맞은 놈의 짧은 비명이 울렸다.

반동으로 그가 머리에 쓰고 있던 선글라스가 튕겨져 나갔다.

나는 곧바로 차의 반대편으로 달려가 조수석 문을 열고, 놈의 머리채를 움켜잡아 밖으로 끌어냈다.


“나와! 이 개새끼야!”


놈을 끌어내리면서 휘두른 몇 번의 주먹에, 내 손등에는 피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난 왼손으로 힘껏 놈의 멱살을 움켜쥐고, 턱을 밀어 젖히며 입을 틀어막았다.

놈의 주먹이 힘을 받지 못하고 내 얼굴 쪽으로 날아들었지만, 상관없었다.

난 있는 힘을 다한 주먹을 녀석의 복부에 몇 번을 꽂아 넣었다.


컥컥거리며 무너져 내린 놈이 배를 움켜쥔 채 주저앉자, 그의 등 너머로 쓰레기통 옆에 놓인 쇠 파이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어디선가에서 떼어낸 듯한, 녹슨 철 파이프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든 손이 내 팔을 움켜잡았다.

어느샌가 다시 돌아온 여름이었다.


"그러지 마. 여정아!"


좀 놀라긴 했지만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는 말은 틀린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누구를 위한 것도, 어떤 이유 때문도 아닌, 오직 폭력을 위한 폭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울먹이며 필사적으로 나를 말리려는 여름이의 모습을 보자, 오히려 더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나를 집어삼켰다.


"이거 놔!"


내 팔에서 떨어져 나간 여름이는 중심을 잃고 쓰러지며, 편의점 야외 의자를 함께 넘어뜨렸다.

창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남자 알바생이 재빨리 달려와 그녀만 일으켜 세웠다.


그 순간, 내 안엔 오직 살의만 남았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녀석의 반쯤 숙여진 머리를 있는 힘껏 내리치기 위해 쇠 파이프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만일 그때, 여름이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들려오지 않았다면,

아마 난 지금 이 이야기의 제목을 '살인자의 고백'으로 바꿔야 했을 것이다.


"제발 그만해! 우리 애 아빠라고!"


손에 들린 쇠 파이프가 허공에서 멈췄다.

어느새 달빛은 구름이 가려 사라져 버렸다.

초점은 흐트러지고, 천천히 외침이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병원에서 여름이를 처음 보았던 그날처럼, 세상이 다시 느려지고 있었다.


알바생의 팔을 뿌리치고 나에게 달려오는 여름이의 모습과,

떨어지는 쇠 파이프가 바닥에 부딪히며 뒹구는 모습.

그리고 정통으로 내 관자놀이를 강타한 주먹에,

시야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아스팔트 바닥이 점점 눈에 가까이 다가왔다.


쿵!


미실이가 카페를 뛰쳐나가기 전 내뱉었던 말들이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그럼 자살이라도 해야 속이 시원하겠니!

내가 그냥 여름이 죽게 내 버려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소리치며 내 이름을 부르던 여름이의 목소리와,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버스 안에서, 꺾인 내 고개를 들어 올리며 걱정스레 바라볼때와 같은 눈빛과, 그 마음을 담아 내 얼굴에 떨어진 눈물,

그리고,

그놈의 신발 밑창이 내 머리를 바닥에 찍어 누르며 아스팔트 바닥에 울린 또 한 번의 둔탁한 충격음에 가려진 여름이의 짧은 비명이 전부였다.

코드를 급하게 뽑은 TV처럼 모든 화면이 꺼졌다.


"어이 학생들. 여기서 자면 안 돼 얼어 죽어."


눈을 떴을 때,

난 내 눈을 바라보고 있는 웬 아저씨의 눈빛에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버스 안이었다.

창문 밖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고, 하품을 하며 눈을 비비는 여름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 여기가 어디야! 어떡해. 벌써 종점까지 온 거야?"


난 동공이 확대된 채로 그녀의 움직이는 입을 쳐다보고 있었다.

챠콜색 모직 코트 사이로 그녀의 베이지색 미니스커트가 눈에 들어왔다.

갈색 앵클부츠 위의 하얀 살결 위로 그녀가 병원에서 넘어지다 냉장고 모서리에 부딪혀 생긴 걸로 보이는 조그만 피멍이 정강이에 퍼져 있었다.


'그 모든 게 꿈이었을까?... '


"야! 너도 잔 거야? 나를 깨웠어야지. 머슴 하나 고른다는 걸 잘못 골랐네."


천천히 버스에서 내렸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날아들어 여름이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리고 말았다.


"아오 추워. 야. 되게 춥다 그치?"


난 하나도 춥지 않았다.

아마도 여름이의 모습을 이렇게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으로 따뜻한 마음 하나를 빼곤 모든 감각이 마비가 되었나 보다.


"어? 목도리? 내 목도리! 여정아. 나 목도리 두고 왔나 봐 얼른 가서 좀 가져다줄래?"


"어? 어... 그래. 잠깐만 기다려."


잽싸게 뛰어가서 우리가 앉았던 자리에 떨어져 있는 검정 목도리를 주워들었을 때, 난 그만 굳어 버리고 말았다.

내가 한참 지나 선물했던 초승달 펜던트의 목걸이가 여름이의 목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날 여름이의 가슴에 얹어주었던 목도리는 분명 오렌지색이었다.


난 황급히 버스에서 내려 여름이가 서 있는 쪽으로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갔다. 뒤돌아선 그녀의 눈빛은 너무나 춥고 슬퍼 보였다.


"여름아! 여기 목도리 가져왔어!"


아무리 달려도 가까운 거리가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내 발밑에 러닝머신이 설치되어 있었다.

여름이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자신의 어깨를 감싼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고 있었다.


그때, 하늘에서 오리털들이 눈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오리털들이 그녀의 몸에 계속 달라붙기 시작했다. 금세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여름이가 하늘을 향해 떠올랐다.

그녀를 따라 올려다 본 하늘에 초승달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난 더 빠르게 달려보려 애를 썼지만, 그럴수록 몸은 슬로비디오처럼 움직였다.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점점 하늘로 향하는 여름이의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여름아! 여름아!! 여름아!!!"


결국 그녀를 삼켜버린 하늘에서 이번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세찬 빗줄기 사이로 갑작스레 버스의 헤드라이트가 환하게 켜졌다.

강한 빛이 동공을 찌르듯 파고들었다.



"뭐. 금방 깨어날 거야. 운이 정말 좋았어. 뇌진탕 증상도 거의 없고, 외상이 쪼끔 심하긴 하지만... "


누군가 내 눈꺼풀을 억지로 열어젖히는 듯한 감각과 함께, 희미한 시야 너머로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의 등이 보였다.

그 옆으로는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 어렴풋이 들어왔다.


"겨울아... "


내 목소리에 흠칫 놀라 뒤돌아본 아저씨는, 다시 고개를 돌려 겨울이에게 말을 건넸다.


"어?... 일어났네? 거봐. 걱정할 거 없다니까."


의사가 나가고 잠시 후.

겨울이는 가방을 뒤져 무언가를 꺼내 내 침대에 던졌다.

포르노 잡지였다.


"뭐... 병원에 입원한다니까 생각나는 게 이것밖에 없더라."


"내가 여기 얼마나 누워 있었던 거냐?"


"일주일."


"뭐?!"


"킥킥 킥. 병신. 그걸 믿냐 그냥 하루도 안됐어 아직 병신아. 아니 하루는 넘었나?"


"... "


난 누워있는 채로 포르노 잡지를 담요 안에 숨기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야. 난 이딴 거 필요 없거든. "


겨울이는 창가를 보며, 농담 따먹기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못 보겠단다 너... "


"응?"


"썸머 그 또라이년 말이야... 한 시간 전쯤에 갔어."


여름이 이야길 듣자 난 일어나 앉기 위해 이불을 걷어내고 손을 짚다가 흠칫 놀랐다. 침대 위가 축축하게 젖어있었던 것이다.


"근데 넌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어떻게 알긴... 하도 울고불고 정신 나간 년처럼 울면서 소리지르고 전화하길래... "


애원하듯 나에게 달려오던 여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난 급하게 올라오는 눈물을 삼키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너 학원은? 기숙사에 있던 거 아니었냐?"


"때려쳤어."


"언제?"


"며칠 안됐다."


"왜?"


"씨발. 육하원칙 다 나오겠네. 야 일단 밖으로 좀 나가자 날씨도 좋은데… 그런데, 참 웃긴 게… 너도 하필 여기네… 참. 엄마가 병원비 다 냈다. 일이 있으셔서 인사 못하고 갔다고 전해주래… 너네 어머니한테는 연락 안 했어. 니가 하던지 해라. "


“어... 그래 고맙다. ”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 겨울이가 입원했던 그 병실이었다. 그리고, 여름이와 사랑이 시작되던 그곳이었다.

난 마치 이전과 다른 비극적인 우주로 이동해 원점(原點)으로 떨어진 여행자가 된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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