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있잖아... 여정아. 그게 실은... "
이후 그녀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온 스토리텔링은 흥행공식에서 벗어난 영화 각본의 시놉시스처럼 생소하게 다가왔다.
그것은 픽션의 틀을 벗어나서 존재해선 안될 이야기들이었다. 그렇기에 난 그 모든 게 그저 그녀가 칠한 립스틱처럼 새빨간 거짓말이기만을 바랐다.
"뭐?! 그러니까 니 말은 지금... 여름이가... 그... 강... 그런걸… 그랬단 거야?!"
미실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난 황당한 나머지 주위를 둘러 개그맨 이경규를 찾아보았다. 어디엔가 분명히 몰래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세상에, 듣고 싶은 얘기만 듣고 살 수는 없다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다 싶었다.
심장이 또 빠르게 뛰었다. 난 아마 부정맥 환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숨이 차오른것 같은 목을 추스리기 위해 깊게 숨을 내쉰후 입을 열었다.
"호... 혹시 그 동아리 선배라는 놈이... 검정 아반떼 끌고 다니는 그놈이야?"
그녀의 눈이 ‘놀람’을 표현했다. 그건 아주 자연스러웠다. 마치 진짜인 것처럼.
"야. 장난하냐 지금? 내가 며칠 전에 여름이랑 그놈하고... "
난 차마 모텔 이야기 까진 할 수 없었다.
"하여튼, 말 좀 되는 소릴 해. 세상에 어떤 여자가 자기한테 그런 짓을 한 남자랑... "
"니가 뭘 봤는지 모르지만... 걔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협박을 당하기도 했고..."
"협박?"
"그래... "
그부분에 있어서는 더 이상의 언급을 회피하고 싶어하는 미실이의 표정을 읽을수 있었다.
난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만일 모든 일이 사실이라고 해도 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내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나도 이 이야길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많이 했어… 그런데 내가 여름이랑 한 약속까지 어기면서 이렇게 너한테 말하는 건... "
그녀의 정돈된 목소리 톤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그동안 여름이가 널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내가 쭉 지켜봐서 잘 알아… 그래서, 걔가 너한테 나쁜 애로 남는 게 친구로서 너무 속상해..."
"뭐?"
"고등학교 3년 내내 만나면 늘 니 이야기를 했거든... 처음에 오빠 친구 중에 귀여운 애가 있다면서 좋아할 때도 그냥 사춘기 장난인 줄만 알았지... 근데 그게 아니더라... 별밤에 너랑 만나는 상상하면서 남의 사연처럼 편지도 보내고... 니가 단골 가게에서 음반을 사 들고나오는 걸 보면 나를 시켜 대신 주인한테 물어서 사 오게 하고…또..."
언젠가 ”내가 얼마나 오래… “라며 말을 흐렸던 여름이가 떠올랐다.
미실이는 뭔가 북받치는 감정을 느꼈는지 눈물까지 흘리기 시작했다.
난 문득 여름이가 헤어지던 날 듣고 있던 Nirvana의 'Rape Me'라는 곡이 떠올랐다. 그게 그녀가 나에게 남긴 이스터에그라도 되는 것이었을까?
미실이의 목소리도 점점 커트 코베인의 절규처럼 격양되고 있었다.
"어쨌든, 여름이 너무 억울해. 내가 다 억울해!
걔가 사고당할 때 약 기운인지 뭔지 그 정신없는데도 너만 생각나더래... 엄마도 아니고 니 얼굴만 떠올랐다고 그랬어. 그런데도 너 상처받는 거 싫다고... "
"야!"
난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어서, 그만 일어나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주위의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마도 난 그들에게 여자나 울리고 소리 나 지르는 쪼잔한 남자로 보였을 테지만, 어차피 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눈치 볼 선은 넘어섰다.
"야. 말 같지 않은 소리 좀 그만해라 어!… 그래. 니 말이 사실이라고 쳐. 그럼 말 안 했으면 되잖아! 그냥 속였으면 되잖아! 그러면 내가 알 길이 없는데… 차라리 그러고 나를 다시 만나지. 나 상처 안 주겠다고 기껏 한다는 게 그런 새끼랑 그런대나 쳐 가는 짓이냐!… 씨발 사랑 두 번만 했다간 아주 창녀 되겠네. "
결국 그녀에게 남아있던 레모네이드 전부는 내 얼굴에 뿌려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들어있던 얼음이 다 녹아버린 것이 다행이었다.
또다시 사람들의 시선은 우리에게 쏠렸고, 그 시선은 쪼잔한 남자에서 쓰레기를 쳐다보는 표정으로 다운그레이드 되었다.
한 손으로 얼굴을 훔치자 뺨에 붙어있던 레몬 한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니가 무슨 얘길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지만 걔가 왜 그런지 생각이나 해봤어? 그럼 자살이라도 해야 속이 시원하겠니?… 내가 그냥 여름이 죽게 내 버려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다!"
뭔가 건너뛴 느낌이었지만, 미실이가 이미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간 뒤라 물어볼 길도 없었다.
아니 이렇게 나가버리면 나 보러 어쩌라는 건가?
자살은 또 뭐고?
강제로 당한 상처로 자살이라도 하려다가, 생각해 보니 좋아서 계속해 보기로 마음이라도 먹었다는 건가?
나 보러 지금 그런 걸 생각해 보라는 말인가?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아무 말이나 막 뱉는 그녀의 감정이입 정도는 중앙대 연극과 실기 심사에서도 너무 지나치단 평가를 내려 감점 사유가 될 정도다.
세상에, 얼굴에 음료수를 끼얹다니...! 이게 정말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단 말인가?
계산을 하려 카운터에 섰을때 이곳이 ’세컨드‘가 아닌것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를 한심하게 쳐다볼 그 알바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까 뛰쳐나가시던 분이 계산하고 가셨는데요."
카운터 앞에서 직원이 아니꼬운 표정으로 나를 훑으며 말했다. 뭐 어차피 또 올곳도 아니니까.
‘미실이… 착해 보였는데 역시 매너는 좋네. 성깔이 좀…’
내가 밖으로 나서기도 전에 대기하고 있던 기섭이가 커피숍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야. 뭐야? 그 여자 울면서 막 뛰어나가던데... 내 얘긴 제대로 한 거냐?... 근데 너 세수했냐?"
난 허탈한 눈으로 기섭이를 쳐다보며 문을 열고 나왔다.
"남자 친구... 있으시단다... "
"뭐?... 뭐야 그럼? 근데 널 왜 보재?... 세컨드 해달래?… 또 우는 건 뭐야? 그래서 니가 싸대기라도 날린 거야?"
난 아마도 반쯤은 정신이 나간 채, 거의 독백처럼 내뱉었다.
"여자의 마음을... 누가 알 수 있지?"
"어?... 아... 씨발 미용실 괜히 다녀왔네... 난 세컨드는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