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마지막 썸머

by 스투키


마치 이솝우화에서 바람과 태양의 내기를 보듯 유월의 햇살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속살을 강요하고 있었다.


"넌 싸움도 못하는 새끼가 무슨 깡으로 덤벼들 생각을 했냐?… 그 새끼 운동 좀 한 새끼 같던데."


병원 매점에서 사 온 캔커피 하나를 내미는 겨울이를 보며, 나는 여름이와 처음 만나 캔커피를 나누어 마시던 날을 의도적으로 떠올렸다.

아마 나는, 여름이와의 모든 순간을 어떻게든 붙잡아두고 싶었던 것 같다.


"어... 야. 나 특공무술 배웠잖아. 모르냐?"


"아! 그래. 맞아 그랬지?… 그래서 고1 때 다른 학교 같은 학년한테 삥 뜯기고 워크맨 뺏기고 석현이한테 이르고 그랬지?"


"시끄러. 증거 있어? "


"뭐... 어쨌든 잘했다. "


"뭘?"


"그 새끼 졸라 팬 거. 사실 나도 정말 죽여... 아니다… 하여튼 씨발 잘했어."


"그런데 넌 학원은 왜 그만둔 거냐?"


질문을 받은 겨울이가 다 마신 캔을 농구 모션으로 가까운 쓰레기통에 던졌다.

하지만 빗나갔고, 땅에 떨어져 구르는 캔을 지나가던 어린아이가 달려오면서 킥을 날려버렸다.


"나 유학 간다... "


"뭐! 갑자기 왜?"


겨울이가 꺼내 문 담배에 불을 붙여줄 라이터에 가스가 다 되었는지 몇 번을 시도해도 불이 붙지 않았다.


"씨발! "


집어 던진 러이터가 이번에는 쓰레기통을 맞고 튕겨저 나갔다. 땅에 떨어진 라이터를 어디선가 달려온 아이가 또 킥을 날렸다. 아까 그 아이같아 보였다.


"뭐. 그 잘난 그새끼 집안에서 원정 출산이니 뭐니 개지랄 떠는 바람에... 그리고 사실 보는 눈도 있고… 그래서 그냥 미국에 가는 게 낫겠다 싶으니... 그 덕에 나도 유학생 소리 한번 들어보는 거지... "


"아... "


"뭐 어쨌든 그러니까 가기 전에 기섭이랑 셋이 한번 뭉치자고,

너 나 없는 사이에 기섭이랑 많이 친해졌다며? 우리 제대로 한번 진짜 추억 한번 제대로 남겨보자고 "


그렇게 말하면서 발길을 돌리던 겨울이는 잠깐 멈칫하더니, 뒷주머니에서 작은 편지봉투 하나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아. 맞다 이거 썸머가 너한테 좀 전해달라고 하더라... 그럼 또 보자. 참. 그리고 우리 엄마가 너한테 미안하대. 여정이처럼 착한 애가 또 없단다.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


건네받은 편지봉투를 보자 문득, 딸의 편지를 뜯지 않고 죽은 엄마의 무덤 앞에 놓아두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하지만, 손에 들린 여름이의 편지는 봄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거리며, 병원에서 처음 보았던 하얗고 미끈한 그녀의 다리처럼 강한 유혹의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이젠 자기를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 미안해. 이해해 줄 거지?'


난 그저 멍하니 한눈에 들어오는 편지라고도 할 수 없는, 굳이 억지로 나누어야 세 문장으로 구성된 그녀의 글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각종 SNS가 활성화된 시점에서 그녀의 문장이 재 평가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당시에는 그저 돋보기를 들고 6월의 따뜻한 빛을 모아 태워버린다 해도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편지에는 글자마다 눈물이 번져있었다.

여름이가 쓴 이 세 문장 안에는 우리가 미처 하지 못했던, 그리고 앞으로 할 수도 없는 수많은 문장들이 담겨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알 수 있었다.


난 무엇을 그렇게 확인받고 싶어서 여름이를 찾아 헤매었던 것일까.

결국 모든 것을 뜯어내 봤자 더 큰 실망과 상처만 드러나게 된다는 기섭이의 얄미운 말을 부정하려 했지만, 오히려 검증한 꼴이 되고 말았다.


난 병실에 돌아오며, 우리가 서로 등을 기댔던 그 문을 쓰다듬어 보았다.

문득 김춘수의 ’꽃’이 떠올랐다.


‘여름이와 내가 이 문에 기대어 서로를 생각하기 전까지 이 문은 그저 하나의 기능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이 문을 쓰다듬었을 때 이 문은 나에게… ‘


“아오!”


쓰다듬다 그만 어디서 튀어나온 지 모를 가시가 박혔다.


‘이 문은 나에게, 아픔이 되었다. ‘


여름이가 떠나기 전날, 난 그동안 그녀에게 배운 문장력을 보여주기 위해 짤막한 메모를 작성했다.


'금이라 버리기도 뭐 해서 말야…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고, 널 위해 산 거니까.


행복하길 바랄게.

안녕. 나의 마지막 썸머.


한때 너의 것이었던

땡땡땡 으로부터'


난 이름 대신 그녀가 가끔 불러주었던 애칭을 적어 넣었다. 이름 세 자에 모두 이응이 들어간다고 붙여주었던 것이다.


“자긴 땡땡땡이야”


“응? 그게 뭔데?”


“뭐든 될 수 있지. 그리움, 고마움, 겸둥이, 내 사랑, 나의 것, 나쁜 놈, 내 서방… 아니 아니, 마지막 꺼 이건 아니고… ”


문득, 그건 진짜 아니었다는 게 너무 일찍 확정됐다는게 아쉬웠다.

메모를 접어서 전해주지 못했던 커플링 상자의 포장을 뜯어 안에 넣고 뚜껑을 닫은 후, 책상 서랍에 있던 언젠가 그녀의 동여맨 머리를 잡아당겨 풀었던 머리끈으로 둘렀다.


그날 밤, 조금 망설이다가 여름이의 집 대문 우체통에 그것을 넣었을 때,

난 약속이라도 한 듯 그녀의 방안에 불이 켜지기를 바랐다.

그리고 드라마에서처럼 그녀의 집 대문을 사이에 두고 하염없이 눈물 흘리며 바라보기만 하는 슬프고도 낭만적인 그런 일은,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가까이 있어도 볼 수 없는 게 이별이라니 참 할거 못된다는 생각만 스쳐갔을 뿐이다.

결국 혼자서 그녀의 불 꺼진 방을 한참 동안 쳐다보며, 우리가 병원에서 처음 만났던 그날의 운명의 그래프가 이제 우리의 점을 지나 서로 다른 점을 찾아 조금씩 이동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난 그날 여름이가 불이 꺼진 방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우리도 한 번쯤은 마음이 통하는 날이 있었을 테니까.



다음날, 난 혼자서 작년의 끝에 겨울이와 올랐던 산의 꼭대기 바위에 앉아 동네를 내려다보며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고 있었다. 하늘에서 굉음 소리와 함께 비행기 한 대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기에 내 첫사랑이 타고 있을까?'


하지만, 그것이 공군 전투기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난 너무 급하게 산에 올라 머리가 어지러워, 벌러덩 바위에 누워 떠가는 구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마음을 조였던 긴장이 조금 풀린 탓인지 스르르 눈이 감겼다.


"어이. 학생. 내려가야지. 여기서 자면 곰한테 먹혀 죽어."


난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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