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후, 겨울이가 유학시절 만난 여성과 귀국해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예식장에서도 여름이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이의 신혼집에 초대를 받았다. 그곳에서 뜻밖에도 거실 테이블에 진열되어 있는 액자들 가운데서 여름이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30대가 된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내가 기억하는 그 모습이었다.
그녀의 옆에는 이제 10대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성장한 그녀를 빼닮은 딸이 교정기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대학원에서 만나 얼마 전 재혼했다는 미국인 남편의 자상한 미소가 그녀의 상처를 따뜻하게 덮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진을 유심히 쳐다보던 나는 동공이 커지고 있었다.
그녀의 딸의 목에 내가 그녀에게 선물한 초승달 펜던트의 목걸이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 위에 살짝 걸친 남편의 손과, 살며시 포개어진 그녀의 손에 익숙한 물건이 눈에 띄었다.
그녀가 떠나기 전 날 그녀의 집 우체통에 넣었던 커플링과 같은 반지가 한 짝씩 손에 끼워져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던 내 입가에 어느새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의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에는 순수하게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실망도 포함되어 있었다. 10년만에 그녀를 다시 보게 된 내 가슴은 요동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 미소는 아마도 체념의 미소였을지도 모른다.
어찌 됐던 그녀는 아마도 정말 알뜰한 아내였던 모양이다.
"야. 그만 헤벌레 쳐다보고 이거나 와서 좀 먹어봐. 왜? 첫사랑 보니까 좋냐?"
겨울이의 아내가 손을 가리고 웃었다.
"뭐야! 다 얘기했어?"
"내가 얘기 안 한다고 모르냐? 저 사람이랑 대학 선후배 사인데."
"아... 그럼 니 첫사랑 이야기도 알어?"
식탁에 음식을 차리던 겨울이 아내가 마치 '세컨드' 커피숍 알바생처럼 접시를 신경질적으로 내려놓고 겨울이를 쳐다보았다.
"하하하. 무슨 소릴 하냐 너 지금? 저 사람이 첫사랑인데... "
"에휴... 소정이만… 아. 정은이 였나? 그 니가 막… 아. 아니다... "
"푸하하하! 자기야! 지금 얘 말 믿는 거 아니지?! 장난치는 거 딱 보면 몰라?"
겨울이 아내의 접시 놓는 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야 겨울아. 근데 그때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 목소리 좋은 간호사 형한테 고백은 했냐? ”
“그만해 쫌… ”
겨울이는 이를 악물고 애원하듯 눈치를 줬다.
여름이가 떠나간 그해, 난 대학 입시를 포기하고 10월에 군에 자원입대를 하였다.
훈련소의 새벽 점호시간에 연병장 가을 하늘엔 서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난 훈련소 2주 차부터 제대 당일까지, 단 한 명을 제외한 모든 군대 동기와 선, 후임 커플들이 깨져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한 커플이 깨져 나갈 때마다 우리 솔로부대들은 마음에도 없는 위로의 말을 던지고는 PX로 달려가 닭강정 파티를 벌였다.
어떤 식으로 만났다가 헤어진 커플이던지 그들도 나와 여름이만큼 사랑했고, 나와 여름이만큼 아파했을 것이다.
모두들 하나같이 자신의 연애담을 굉장한 러브스토리 인 것처럼 늘어놓지만, 기섭이가 말했던 것처럼, 다 거기서 거기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사랑했고 행복했으며, 헤어졌고 아파했다는 틀 안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며 오직 자신만이 특별한 사랑을 경험했다는 듯 침을 튀긴다.
하지만 그러한 타인들의 일반적인 시선 속에서도 사랑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었던 서로의 특별한 존재감을 알기에, 사랑은 그리움이라는 다른 이름이 되어 가슴 한편에 남는다.
그 시절의 사랑은 한여름 아름다운 해변가에 불붙은 모닥불처럼 활활 타올랐다.
그러나 대부분은 미처 다 타들어가지 못하고 남은 재로 한쪽 가슴을 그을린 채로 남아있다.
아마도 여러 해가 지나도록 그 시절의 계절 바람을 타고 다시 흩날리기도 할 것이다.
'기억해 주길 바래. 점점 소멸되기보단 한 번에 불타오르는 것이 낫다는 것을'
1997년 가을. 경기도의 한 부대를 등지고 나오면서 결국,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커트 코베인의 유서는 결국 스킨십의 단계를 밟아가는 것 따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는 최종 해석으로만 남았다.
"여정아!"
얼마 걸어 나오지 않아 등 뒤에서 부르는 내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처음 보는 고급 세단의 문을 열고 한 남자가 나왔다.
"석현... 이!"
"야! 그래 나야 석현이. 하하하. 새끼. 제대를 축하한다."
-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