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기억은, 마치 너무 꾹 눌러써 지우개로 몇 번을 문질러도 자국이 남아있는 공책 한 켠의 부끄러운 낙서 같았다.
그 투명한 자국 위를 연필로 살살 쓸어낸 것처럼, 오히려 더 또렷하게 되살아난다.
하늘로 떠오를 땐,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자각하지 못했을 뿐, 조류의 발톱에 터지든, 수소가 빠져 쪼그라들든, 풍선은 결국 추락하기 마련이다.
"저기요. 손님. 이거... "
난 적어도 알바생이 반지 상자를 돌려주는 그 순간, 내 마음속에 쪽팔림이라도 형성되길 바랐다. 그건 적어도 무언가를 견디려는 의지를 동반하니까.
하지만, 난 전혀 창피하지도, 또 나 자신이 우습지도 않았다. 그저 한 손에는 돌려받은 반지 상자를, 또 한 손엔 향기가 땅으로 꼬꾸라진 빨간 장미 다발을 쥐고서,
우리의 100일 기념일이 담배연기처럼 기분 나쁜 냄새를 온몸에 배이며, 달빛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며칠 전부터, 곧 있을 학교 축제 동아리 모임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다던 그녀의 말이 사실이기만을 바랐다. 그래서 오늘도 연락조차 하기 힘든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을 거라고.
어쩌면 그녀도, 그저 나처럼 기념일 따위 공휴일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는 긍정을 머릿속에 욱여넣고 있었다.
난 마치 어린이대공원에서 잃어버린 엄마를 기다리며, 손에 꽉 쥔 수소풍선을 들고 서 있는 다섯 살짜리 꼬마아이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불안한 느낌은 왜 꼭 들어맞는가?‘는 확률과 통계의 문제다.
사람들은 언제나 불행이 코앞에 닥쳐와서야 비로소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의 방어심리는 부정적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에 최적화되어있지 않다. 그래서 결국에는 아무 근거 없는 희망을 붙들며 버티는 쪽을 택한다.
마치 세상에 멀쩡한 천재들이 차고 넘침에도 불구하고 몇몇 요절한 천재를 예로 들며 '천재는 요절한다'라는 말을 퍼뜨리는 것처럼,
일반화의 오류는 그저 시기, 질투, 망상, 허영이 만들어 내는 인간 심리의 오작동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오늘 한 명 더 추가되었다.
남산 타워든, 롯데월드든, 반지든, 장미든, 영화 감상이든, 맛있는 밥이든, 사진이든, 케이크든, 그런 모든 것들은 나에겐 무용지물이 되어도, 대신 얼마든지 다른 이들에게 감상되고, 먹히고, 찍고, 껴지고, 태워지고, 추억이 될 테니,
세상에게 나의 슬픔이나 감정 따윈 그저 코를 풀고 버려지는 휴지보다 더 보잘것없는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에 가치를 부여해 줄 누군가를 찾아 그렇게 밤길을 헤매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흘 나흘, 일주일, 열흘이 지나도, 그녀는 나의 간절함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100통이 넘는 삐삐 음성 메시지도 이제는 씹히는 것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학교를 찾아가도 그녀의 동기들을 붙잡아도 소득이 없었다.
기숙 학원의 겨울이 마저 연락이 닿지 않았다.
‘혹시. 원래부터 없었을까?‘
그녀는 작년 겨울 뒷산의 겨울이 처럼 사라져 버렸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개소리에 기댈수록 짖어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모두가 침묵할수록 이유를 알고 싶은 마음은 커져만 갔다.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푯말을 본 순간 잔디를 짓밟고 싶은 것처럼.
당구장에서 만난 기섭이의 판단은 빠르고 차가웠다. 이 녀석은 학창 시절 윤리선생님이 알려준 1959년대 배포된 MBTI 성격유형으로 보면 짜증 나는 놈에 가까웠다.
"야. 그냥 잊어. 니가 모르는 게 나으니까. 잠수 탄 거겠지"
당구 큐대에 초크를 문지르면서 기섭이가 위로했다.
"말이 되냐? 암이라도 걸려 죽게 된 게 아닌 이상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연락을 뚝 끊을 수 있냐고?"
"너 정말 모르겠냐?"
"뭐가?"
"병신 답답하네. 내가 말 안 할라 그랬는데.
딴 남자 생긴 거잖아. 딱 보면 몰라? 넌 그냥 병신... 아니 재수생이고, 거긴 깔린 게 시발 똑똑하고 멋진 대학생 새끼들인데, 너랑 노는 게 재미나 있었겠냐고?
여름인가 뭐 걔가 무슨 평강공주도 아니고...
아 씨발! 초크 졸라 발랐는데도 삑사리야 썅!"
"그렇더라도 씨발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헤어져도 예의라는 게 있는데."
"아. 진짜 병신. 딸딸이 치다 엄마한테 걸리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야! 넌 씨발 엄마한테 딸딸이 친다고 말씀드리고 치냐?
그냥 씨발 몰래 치는 거지. 얼른 공이나 치기나 해."
집중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그날따라 내가 친 당구공은 연속해서 각으로 잰 듯 정확히 쓰리쿠션을 돌아 적구를 맞추었다.
"너 이 씹세끼. 지금 맘 아프다는 거 뻥이지. 미친 듯이 쳐대고 있어 병신이."
기섭이가 말한 것을 생각 안 해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기섭이는 몰라서 한 말이겠지만, 그녀가 나에게 했던 모든 행동들과 상황들 중 어느 것도 의심을 살 만한 것이 없었다.
기섭이 말대로라면, 그 모든 것이 그저 연기였단 말인데, 세상에 오스카 여우 주연상도 그런 메서드 연기를 해낼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면 믿음이 흔들리고 망상이 올라오기도 한다.
어쩌면, 겨울이를 기숙 학원에 보낸 것도 사실은 내가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나’라는 연막을 이용해서 오빠인 겨울이 눈을 피해 대학 생활을 좀 더 방탕하게 지내고자 했을 수도 있다.
평소 공부만 해왔던 스트레스가 대학생이 되면서 성(性) 적인 욕구로 분출되는 병리적 현상을 겪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다다르자, 지난번 비디오방에서 울리던 그녀의 격정적인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생각해 보니, 그녀의 손이 내 엉덩이를 움켜쥐는 힘의 크기는 마치 커피 캔을 으스러뜨릴 듯 강렬했고, 내 가슴에 남긴 키스 마크는 생각보다 오랜 기간 남아있었다.
난 그저 내 피부가 약한 것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둘만의 공간에서 그녀가 자신의 풀어헤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입술이 점점 내 아래쪽으로 이동하려 했을 때도, 겨울이의 파블로프의 개가 되어 그녀를 다시 끌어올린 건 나였다.
거기다, 새로 산 섹시한 잠옷이란 또 무엇인가?
‘그런 걸 부모님이랑 같이 사는 집에서 입으려고 샀다는 것 자체가… ‘
삐삐삐삐. 삐삐삐삐. 삐삐...
난, 이번에는 삐삐로프의 개가 된 듯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앞뒤 주머니를 뒤졌다.
곧이어 가방을 쏟아 삐삐를 찾고 있는 내 모습을 기섭이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여름이에게 받은 반 지갑이 '툭' 하고 떨어져 나왔다.
"... 병신. 야. 저기 다이 위에 있잖아."
"어? 어. 그러네. 야. 여기 가방 좀 챙겨줘."
급히 카운터로 뛰어가 삐삐 음성을 확인하기 위해 다이얼을 누르는 내 손은 떨리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방금 전에 떠올랐던 생각은 싹 다 사라진 채 '제발'이라는 단어만 홀로 남아있었다.
"난데... 30분 있다가 '세컨드'에서 만나. 기다릴게."
수화기를 타고 여름이의 건조한 음성이 들려왔다.
난 멍하니 발길을 돌려 다시 우리가 치던 당구대 소파에 '털썩' 하고 앉았다.
기섭이는 내 책가방을 정리하다 발견한 지갑 속에 나와 여름이가 '롯데월드' 놀러 가서 돈 주고 찍었던 유일한 즉석 사진 한 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걔냐? 왜? 만나재?"
난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던 연락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난 그녀의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가 만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난 내 생각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깊이 그녀 안으로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가지 말라니까 병신아! 가봤자 마음만 더 다치는 거야. 뻔하다니까. 그러지 말고 나랑 좀 이따 나이트나 가자.
내가 책임지고 홍콩 보내준다 오늘.
이야~ 오늘 씨발 드디어 내가 큰맘 먹고 친구 아다 한번 떼준다.
야. 니가 씨발 여시들 가슴을 안 만져봐서 모르는 모양인데 여잔 다 씨발 거기서 거기라니까. 야. 막말루 니가 씨발 존나게... 아... 아니다... 어쨌건 가지 마. 이 형님 말 믿어."
기섭이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니, 맞을 것이다.
아무리 반항을 해도 부모님 말씀이 결국 옳았던 것처럼, 경험에서 나온 노하우를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연락이 끊긴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냥 그녀와의 좋은 추억들만 간직한 지금 이대로 시간이 빨리 흘러갔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분명 마음 한편에서 나를 부추기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겐 첫사랑이었다. 흐지부지 끝내버리는 것은 서로의 첫사랑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난 단지 확인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헤어져야 하는지 이유 같은 것은 이제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마지막 말을 듣고 싶었을 뿐이다. 어떤 것이 더 상처가 되는지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지만… 이런 머릿속에 생각들은 사실 모두 자신을 속이는 가상의 시뮬레이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다.
난 그저 그녀가 너무 보고 싶었다.
거기엔 아무런 이유를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냥 그동안 그녀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미치도록, 죽도록 보고 싶었다.
그런 그녀가 나를 기다린다는 데에도 그 자릴 피할 수 있는 회피 스킬은 내겐 단 1도 찍혀있지 않은 상태였다.
"여정아. 너 연인 사이에서 제일 비참한 게 뭔 줄 아냐?“
난 듣고 싶지 않았다.
”이미 상대는 끝났다는 걸 알고도, 너처럼 돌아선 마음에 기댈려 그러는 거야."
난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듣고 싶지 않은 말도 들어야 한다면,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봐야 할 때도 있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