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자기야. 우리 100일 날 뭐 할까?"
사실 난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연애가 너무 수동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비디오방’을 제안한 것도 여름이었다.
때로 그녀의 카리스마는 너무 압도적이어서 내가 길들여지는 기분마저 들 때가 있었다.
나는 그것이 그녀 특유의 기질인지, 아니면 가부장적이고 아들 중심의 가정 문화에 대한 반감으로 나타난 성향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후자 쪽이라면, 그건 상처가 기반이라는 생각에 치유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여름이는 왜 나를 좋아하게 된 걸까?
혹시, 오빠에 대한 열등감 같은 걸 나에게 투사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오빠가 가진 무언가를 대신 움켜쥐려는 무의식의 발현이라도 되는 걸까?
“여름아. 자기는 내가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잘생겼잖아.”
“내가?”
“응. 겨울 오빠도 너 잘생겼다고 그랬어. 그런데, 자기가 아직도 그걸 모른다는 게 너무 좋아. 이젠 평생 몰라야 될 거야. 바람피우면 알지? 주욱~어 진짜”
엄마 친구들의 인사치레 이외엔 처음 듣는 말이다.
하긴, 나도 잘생긴 친구들에게 "잘생겼다"라는 소린 해본 적은 없었다. 여자들끼리의 ’예쁘다‘와는 달리 남자들끼리에서는 금기어에 속하는 말이기도 하다. 대신 반댓말은 다양하게 얼마든지 허용된다.
난 거울을 보는 것도, 사진을 찍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후자는 아주 싫어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것이다.
그날, 여름이 말이 떠올라 엄마 방 화장대 거울 앞에 섰다.
내 방 거울은, 2년 전에 깨뜨린 뒤로 다시 놓인 적이 없었다.
”아빠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으면 거울을 봐. 넌 아빠를 빼다 박았어. “
천천히 내 뺨을 만져보았다.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자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세차게 내 뺨을 후려치고 방을 빠져나왔다.
“자기는, 내가 자기를 좋아할 줄 알았어?”
질문에 여름이는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응? 당연한거 아냐? 나를 안 좋아하면 누굴 좋아하겠어? 이쁘지, 똑똑하지, 섹~시하지”
여름이가 옆모습을 보이며, 한쪽 발꿈치를 들고 손가락을 모두 펴서 자신의 몸매를 훑고 내려갔다.
”엄마가 그랬어. 넌 대학만 가면 원하는 건 다 가질 수 있다고. 그게 일단은 오 여정 너야. “
”그럼 2단은? “
”어? 2단? … 어 그건… 풋. 비밀. “
“어? 뭔데 비밀이야. 비밀 없기로 해놓고 뭐야. 뭔데?”
사실 별로 안 궁금했다.
난 호기심과는 담쌓은 놈이다.
”아 몰라. 됐고 자기 우리 100일 날 뭐 할지 생각해 놨어? “
아 맞다. 이거부터 시작이었지?
‘난 사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난 문득, 강한 남성성을 어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여름이의 상처로 발현됐을 정신적 뾰루지를 짓눌러 터트려준다면 치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가 가끔, 마냥 숙맥이 아닌 내 모습에 수줍게 웃으며 좋아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녀도 남자인 내가 자기를 이끌어 주기를 분명히 바랄 것이다.
[아직도 난 그 기억이 떠오르면 얼굴이 달아오른다. 이미 남성성에 짓눌려 곪은 상처를, 또 같은 방식으로 짓눌러 터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니, 그게 그때 내 사고의 한계였다.]
“그럼. 생각했지. 그날 우리 롯데 월드 가자.”
나의 명령조의 이 단호한 말투는 그야말로 남성성이 돋보이는 리더십의 표본이었다.
“거긴 지난번에 갔다 왔잖아. 100일인데 안 가본 데 가야지. 그러지 말고 우리 남산타워 가보자. 나 자기랑 거기 가보고 싶어.”
“어… 남산타워 그래 그렇지… 그래 거기 가자. 나도 거기가 좋을 것 같애. 거기가… 높잖아.”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대답이었다. 역시 난 길들여지고 있었다.
“그래. 그럼 자기야 우리 거기 갔다가, 또 어디 갈까?”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마저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이런 종속적인 관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난 그게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어… 그럼 우리 집 가자.”
“어? 자기 집? 어머니 계시잖아.”
“엄마 그날 가게 모임에서 놀러 가셔서 다음날 오실 거라 밤늦게까지 같이 있어두 돼. “
여름이 특유의 좋으면서 수줍은 그 표정이 나왔다. 일단은 성공이다.
난 여기서 조금만 더 뭔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이가 좋아하는 게 뭐가 있지? 뭐가…!’
“자기야, 그리고 우리 그날 남산타워 가서 같이 사진 찍자. 내가 필름 사서 카메라 챙겨갈게"
“진짜?”
여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사진 찍는 것을 거의 병적으로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던 그녀였기에 반응이 남달랐다.
“진짜지? 자기 무르기 없다 퉤 퉤 퉤. 내가 사실 그 말하려다 못했는데 히히히. 그날 우리 100일이니까 100장 찍을 각오 해.”
난 100장이란 말을 듣자마자 내 말을 후회함과 동시에 24장짜리 코닥 필름 5개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좋아. 이 누나가 특별히 그날, 이번에 새로 산 잠옷 입은 거 보여준다.”
그러고는 갑자기 다가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참고로 엄~청 섹시하거든?”
[오랜 시간이 흐른 아직도, 난 가끔 그때 말한 그 잠옷이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지 궁금할 때가 있다.]
100일 기념일 준비가 바빠졌다.
“여자한테 사랑은 무조건 반지야. 더 정확히 말하면 금이 들어간 반지. ”
여대 퀸카 출신인 기섭이 누나는 그동안 여러 남자들한테 받은 반지를 모아놓은 상자를 보여주며 조언해 주었다.
“보석이 살짝 들어가면 더 좋지. 여자는 빛나야 하거든. 이렇게…”
누나는 뭔가 보여주려는 듯 손가락으로 상자를 이리저리 뒤척였다.
“어? 여기 분명히…! 기섭이 너!”
이미 기섭이는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통장에 있는 돈을 모두 털어서 작은 큐빅이 박힌 14k 커플링을 구입했다. 난 며칠간 여름이의 손가락 치수를 몰래 파악해 보느라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당일 장미꽃과 케이크도 예약해 놓았다.
장롱에 처박혀있는 올림푸스 카메라를 꺼내 안에 들어있는 필름을 새것으로 바꿔 끼웠다.
들어있던 필름에는 무슨 사진이 찍혀있는지도 모를 만큼 엄마도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으신다.
어쩌면 그건 그냥 유전일지도 몰랐다.
케이크는 우리 집에서 2차 서프라이즈를 하려고 하루 전 날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한다는 것이 설레는 일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난 늘 받기만 하는 셀피쉬한 외아들이었다.
여름이는 그런 나를 근본부터 흔들고 있었다.
갑자기 엄마한테 죄송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먼저 1차 서프라이즈로 준비한, 반지를 전해주는 것에 대한 여러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대부분은 영화에서 본 것들이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냥 알바생에게 커피잔과 함께 탁자에 좀 올려달라고 하기로 마음먹었다.
알바생이 좀 신경질 적이긴 하지만, 단골이라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네. 그렇게 해드리죠 뭐. ”
여전히 퉁명스러운 알바생의 목소리가 이젠 정이 들 지경이다.
반지를 보고 기뻐할 여름이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내 기분은 수소 풍선처럼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불현듯, 뒷산에서 겨울이 사고가 있던 그날 보았던 오리털 패딩이 부풀어 하늘을 오르는 꿈이 떠올랐다. 그 꿈은 참 여러모로 나에게 의미를 던져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100일 이라는 우리 커플에게도 함께 기념할 만한 이벤트가 찾아왔다. 1주년도 아니고 고작 3개월 남짓한 날을 가지고 왠 호들갑을 그렇게 떠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이젠 여름이때문에 오는 충격적인 변화를 그냥 받아들이는것에 익숙해졌다.
[그땐 잠시 정신이 나가 있었다. 난 오랜시간이 지난 지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건 그냥 마케팅에 놀아나는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