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파블로프의 개

by 스투키


‘야’에서 ‘자기야’로 호칭이 바뀌었을 때 보다,

‘좋아해’에서 ‘사랑해’로 감정의 깊이가 더해질 때, 더 많은 신뢰가 쌓인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신뢰에는 몸이 같이 반응한다는 것도.


우리는 첫 키스 이후, 머지않아 키스를 한 시간 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생일 기념으로 처음 가 보았던 ‘비디오방‘에서 골랐던 100분짜리 영화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대』(He Said, She Said)의 전반 30분 정도만 어렴풋이 기억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처음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아무 의미도 없는 줄 알고 지냈던 ‘생일‘이 특별한 날이라는 것 정도다.

[지금을 다시 돌아보건대 그건 그때의 ‘한정적‘ 특별함이다.]


아직 날이 풀리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서툴렀던 우리가 서로의 목에 남긴 키스 자국은 여름이의 파운데이션으로도 잘 가려지지 않았다. 우린 목도리의 새로운 용도를 알게 되었다.

영화가 끝난 뒤엔, 마치 죄인처럼 알바생과 눈도 못 마주치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알바생과의 궁합이 꽤 안 맞는 커플이었다.


“첫 키스 하기까지가 어려운 거지.”


기섭이의 말은 바이블 같았다.


우린 서로 사랑했고, 심장은 지옥의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거기다 ’ 비디오방‘이라는 세기말이 낳은 악마의 유산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었다.


나는 기섭이에게 들은 여성 성감대라는 걸 알아보기 위해, 그녀의 귓불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갖다 댔다.

여름이는 가느다란 탄식을 내뱉으며 천천히 목을 젖히더니, 안고 았던 손으로 내 등을 살짝 때렸다.


"자기. 이런 거 어디서 배웠어? 자기 나 말고 딴 여자 사귄 적 있어?"


효과는 있는 모양이었다. 난 마음속으로 기섭이에 대한 무한 신뢰를 보냈다.

여름이의 의심은 곧 브래지어 끈을 풀려고 바둥대는 내 모습에 사그라들었다.


"잠깐만. 자기야"


답답했던지, 이번엔 여름이가 직접 나섰다.

등 뒤로 손을 넣더니, 딸깍.


"됐다."


무언가 대단히 어려운 것을 간단히 해낸 듯한 그녀의 흡족하고 수줍은 미소가 다시 나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브래지어에는 신기하게도 어깨끈이 없었다.


단추를 모두 풀어헤친 그녀의 옥스퍼드 셔츠 속에 숨어 있던 살들에 내 뺨이 닿았다.

얼마 전 내 상처에 닿았던 입술보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자신의 숨소리가 영화 사운드보다 커졌다고 느꼈는지, 여름이는 자기 입을 막으려는 듯 내 머리를 꽉 움켜쥐며 키스를 퍼부었다.

우리 스킨십의 경계는 외줄 타기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비 오는 날 꽉 조인 영국 모델의 레인코트 벨트처럼 경계를 넘어 새어 들어갈 틈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두려움이 만들어낸 투명 보호막이었다.

우린 어렸고, 아직까진 그것을 걷어낼 만큼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무엇보다 강력한 보호막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중요한 순간마다 트라우마처럼 떠오르는 겨울이 녀석의 얼굴이다.

때문에, 우리의 스킨십 확장에 제동이 걸리는 이유는 여름이가 아니라, 겨울이의 파블로프의 개가 된 나로 인해서였다.

그놈은 정말 악마 같은 놈이다.


그녀는 대학생이 되었고, 난 재수생이 되었다.

우리는 ‘신분을 초월한 ‘ 사랑의 주인공이 되었다.

중세시대가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향인지 모른다.


나는 그녀의 졸업 및 입학 선물로 기섭이에게 돈을 빌려 작은 초승달 모양의 펜던트가 달린 14k 금목걸이를 선물했다.

그녀는 평소 주머니 여기저기에서 돈을 꺼내는 내 모습이 안돼 보였는지, 꽤 비싼 반지갑을 졸업 및 생일 선물로 주었다.

지갑 안에는 그녀의 사진과, '비상시에만 쓸 것'이라는 글자가 적힌 만 원 지폐 한 장이 들어있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기섭이와 편을 먹고 친 내기 당구가 그 ‘비상시‘가 되었다.


“그게 그 비상시야? ‘나랑 비상시‘라는 의미지. 꼭 다 말로 해줘야 돼?”


여름이는 틈틈이 내 공부를 봐줬다.

간혹, 여건이 돼서 둘 만의 시간이 만들어질 때면,

난 공부는 안 하고, 그녀의 뿔테안경과 머리끈을 슬쩍 풀어보곤 했다.

이쁜 글래머 과외 선생님 로망은 그 출처가 좋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 쫌 장난하지 말… 흡.”


이제 나도 여름이도 스킨십 ’쫌‘ 한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간단하게 체크만 하는 정도였지만, 아예 텅 빈 내 머리에는 꽤 효과가 있었다.

난 3월 말 모의고사에서 94점을 맞았다.


“잘했어 여정! 아자아자! 이제 남은 3번의 모의고사에서 30점씩만 올리면 서울대에 갈 수도 있어.”


여름이는 사랑에 눈이 멀었다.


그녀는 동기부여 차원에서 자신의 교양과목을 도강시키기도 했다.

주위가 온통 여학생뿐이라 얼굴만 빨개졌다.


‘난 여전히 숙맥이었다.‘


같은 과 동기들과 얼떨결에 노래방에 따라가 여름이와 김현철. 이소라의 '그대 안에 블루'를 목청껏 부르기도 했다.


나와 같은 세대지만, ‘대학의 위엄‘이란 이런 것인지 꼭 이모들 같았다. 난 치마폭에 둘러싸인 어린애처럼 다뤄졌고, 과자 사 먹으라고 용돈을 손에 쥐여주는 일은 아직 없었지만 술 마시고 귀엽다며 머리를 쓰다듬는 일은 몇 번 있었다.

여름이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진한 화장에 파마머리였으니 그런 착각이 드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자기는 내가 저 동기들 중에 누구랑 눈이라도 맞으면 어쩌려고 그래?"


나름 그런 자리의 불편한 마음을 전하기 위한 완곡한 표현이었다.


"응? 뭐? 지금 뭐라 그랬어!"


꼬였다.

이걸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일 줄은 소크라테스도 몰랐을 거다.


"어? 아니. 그게 아니라 내 말은... "


"누구 마음에 드는 애 있어? 누군데? 왜? 소개시켜줘?"


급하게 격해진 여름이의 커다란 눈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맺힐 것 같으면서도 한 대 칠 것 같은 기운도 서려 있었다.

급한 내 머릿속은 경고를 울렸다.

‘빨리 넘겨야 한다.’


"아... 그게 아니라… 자기 빼고 다들 무슨… 아주 다 지들이 이본, 심은하라도 되는 줄 아나 봐, 립스틱은 죄다 같은 초콜릿 계열에, 헤어는 또 그게 뭐냐 요상한 단발에, 어울리지도 않는 패션 파마에… 그러니까 내 말은... 자기가 나를 너무 안심…"


"자세히도 봤다?"


"응?"


"자기도 그런 여자 좋아하나 부지? 왜? 나는 화장도 잘 안 하고 머리는 맨날 묶고 영심이처럼 다녀서 꼴 보기 싫은데 억지로 만나는 거야?… 나도 다 할 줄 알아. 자기가 수수한 스타일이 좋다며? 누군 못해서 안 하는 줄 알아? 그때 병원에서 못 봤어?"


여름이는 내가 그날 병원에서 화장한 자기의 모습을 본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본 거라곤…

그녀는 나와 끼고 있던 팔짱을 세차게 풀며 빠른 걸음으로 혼자 걸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의 입에서 '다시는 그런 말 입은 물론 뇌 속에 담지도 말라'는 퉁명스러운 음성이 들리기까지 나의 기나긴 재롱이 이어졌다.


우리는 뒷산에 올라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 지난겨울, 겨울이가 오줌 싸다 굴러 떨어진 곳을 견학시켜 주었다. 물론 더 과장해서, 난 영웅처럼 보이게, 겨울이는 찐따처럼 보이게.

여름이는 중3 때, 자기 집에서 오빠와 잠자고 있는 내 모습을 몰래 지켜본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졸업앨범에서 오려낸 내 사진이 들어 있는 지갑도 보여주었다.

그녀는 내가 기억하는 지난날의 서너 번 마주침보다 훨씬 더 많은 순간들의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냥 그렇게 잠깐의 사춘기가 품은 설렘만 간직한 채 살아가는 편이 더 좋았지 않았을까?

그녀 기억 속 내 모습이 더 오래, 더 선명하게 웃고 있었을 테니.


"그런데, 자기야. 우리 100일 날 뭐 할까?"


그러고 보니 벌써 그녀와 사귄 지 93일이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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