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란 참 신기한 구석이 있었다.
'야'에서 '자기야'로 호칭이 바뀐 후 우리의 모습은 그만큼 진보해 나갔다.
여름이는 동네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어느 곳에서든지 내 팔짱을 꼭 끼고 다녔다.
아직은 옷이 두께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분명히 내 팔에 닿는 그녀의 가슴을 여름이도 느끼고 있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물론 차마 물어볼 수는 없었다.
아마 처음으로 여자가 되어보고 싶다고 느낀 것이 그때였던 것 같다.
[10여 년이 지난 후에야, TV 토크쇼를 보다 한 여성 패널로부터 그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당연히 여자도 느끼죠“]
난 사실, 그녀에게 어떤 성(性) 적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친구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가장 큰 주범이었을 것이다.
여름이의 평소 패션은 단순했다.
그때 병원에서 봤던 과감한 차림은 순전히 겨울이의 무심한 농담 때문에 이루어진, 내게는 일종의 고마운 해프닝이었다.
"여정이? 야. 여정이고 나발이고 남자는 다 섹시한 여자를 좋아하지. 쫙 빠진 그 뭐랄까?... 알잖아 그거. 너랑 반대로 생각하면 딱 되겠네. 너같이 공부만 해서 머리가 이상해진 년들을 보면 아마 기겁하고 도망칠걸? … 하긴... 여정이 그 새끼가 쫌 병신처럼 순진한 구석이 있어서... 근데 그건 왜?"
어쩌면, 여름이의 단순한 차림은 6센티밖에 크지 않은 나와 키를 맞추려고 늘 단화만 신다 보니 특별히 고를 옷도 없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조금 통통해 보이긴 하지만 170센티나 되는 키에 일자로 뻗은 기다란 다리를 연결하는 성별이 확연하게 구별되는 골반과 헐렁한 후드티를 입어도 드러나는 여성성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러한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만들어 버리곤 했다.
"야. 너 내 동생이랑 만난다며?"
"어? 아니."
"아니긴 뭐가 아냐 새꺄. 기섭이가 얼마 전 종로에서 봤다는데. 너랑 어떤 쭉빵녀랑 팔짱 끼고 돌아다니는 거"
"어... 그러니까 그게... 근데 그게 니 동생인지 어떻게 알어?"
"어떻게 알긴. 그때 기섭이 옆에 내가 있었으니까 알지 병신아."
빠져나갈 구멍은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속이려던 건 아니었다.
다만 이런 관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전혀 감도 오지 않았다.
“아직은 오빠한테 말하지 마”라는 여름이의 당부가 좋은 구실이 됐다. 구차하긴 해도 변명 꺼리는 생긴 샘이었으니까.
"썸머가 먼저 들이대디?"
"어?... 아냐... 내가 먼저 사귀자고 했어... 말 못 해서 미안하다."
"좆까구 있네. 니가 퍽이나?… 하긴. 너같이 꼬시기 쉬운 새끼가 어디 있겠냐. 미친년, 내가 병원에 그 지랄하고 올 때부터 알아봤지."
"그게 아니라... "
"야 됐고, 일단 내가 알고 있다는 거 썸머한테는 비밀로 해라."
겨울이는 뭔가 급한 약속이라도 있는지 시계를 한번 쳐다보고 발길을 돌렸다.
난 다급하게 겨울이의 등에 대고 검증에 들어갔다.
"그럼 나 만나도 되는 거야?"
"그런 건 병신아. 만나기 전에나 물어보는 거지. 어쨌든 팔짱 이상은 안된다!… 그리고 너 이제 우리 ‘배드맨 클럽’에서 영구 강퇴야 새꺄!"
전 세계의 밤 문화를 온전히 섭렵하자는 취지로 발족한 '배드맨 클럽'은 기섭이의 주도로 겨울이와 나,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때 돌연 호주로 유학을 떠나버린 석현이가 중학교 때 결성한 비밀 사교 모임이었다.
당시에는 나이가 어렸으므로 자료들이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어렵게 청계천에서 포xx 잡지나 비디오를 구입하거나 -구입한 비디오는 대부분 코미디 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 밤에'가 녹화되어 있는 사기였다-
가끔 당구장에 가서 야한 차림의 모델들이 수놓인 달력을 몰래 찢어 오거나 통째로 훔쳐 오는 일도 있었다.
그랬기에 겨울이가 중학교 3학년 시험기간 때 들었던 그 테이프는 당시 보물급에 속했다.
[아. 만일 그때가 지금 같은 세상이었다면 아마 우린 미쳐버렸을거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린 그런 자료들을 'BADMAN'이라고 적힌 통에 모아 기섭이가 보관토록 했다.
하지만 어느 날, 그놈이 방문 잠그는 걸 깜박하고 자위행위에 심취한 나머지 부모님께 걸려 모두 불태워졌다.
당시, 우린 모든 걸 혼자 뒤집어쓴 기섭이의 영웅적 행위에 박수를 보냈지만, 겨울이만은 예외였다.
"저 새끼. 어디다 팔아먹고 뻥치는 걸 거야 씨발."
카페 문을 열고 여름이가 찡그린 얼굴로 툴툴거리며 다가왔다.
"아씨. 짜증 나…"
여름이가 소파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난 그녀에게 눌리는 소파의 깊이와 내 것을 비교 관찰하며 그녀의 몸무게를 예상해 보았다.
“육… 십. 삼… ”
“뭐가 육십삼이야?”
내가 속으로 생각한 말을 내뱉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 아니 육십삼… 층 빌딩 있잖아… 거기 같이 가볼까 하고… 근데 표정이 왜? 무슨 일 있어?"
"어. 있어. 자기가 오빠한테 말했어? 우리 사귄다고?"
"어? 아니."
"아니긴 뭐가 아니야? 다 알고 있던데, 자기가 말 안 하면 어떻게 알아 걔가?"
"어... 글쎄. 어떻게 알았을까? 호... 옥시 자기랑 나랑 그때 종로 서점 갔을 때 기섭이가 보고 일렀을 수도 있지 않았을… 까?"
여름이가 이쁘게 째려봤다. 그런데, 도대체 이쁘게 째려본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콩깍지가 내린 저주일까?
"아니. 그게... 그러니까 뭐 어차피 알게 될 일인데 좀 빨리 알았다고 문제 될 게 없지 않느냐는 이야기지 내 말은."
"나 삐삐 뺏겼단 말야. 어떡해 이제."
‘얘네 둘은 주로 뭘 뺏는구나… ‘
"어? 우리 만나는 거 방해한다고 협박이라도 한 거야? 걱정 마 내가 다시 뺏어줄게."
여름이가 한숨을 쉬고 어깨를 늘어뜨리며, 눈으로는 나를 보고 ’뭘 모르는 놈‘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엄마에게 이르시겠데요."
"엄마? 너희 엄마 나 엄청 좋아하잖아. 너도 뭐 이제 대학 들어가겠다. 별 문제없지 않아?"
사실이었다. 겨울이의 엄마는 중학교 시절부터 항상 시험기간에 내가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봐왔다.
때문에 먼저 잠든 겨울이는 늘 두들겨 맞았다.
각인된 인상이란 쉽게 손상되지 않는다. 덕분에 이번에 대학입시에 떨어졌어도 겨울이 엄마에게만큼은 머리가 좀 딸리지만 성실한 아이의 이미지가 남아있었다.
“우리 엄마가 너보고 세상에서 젤 착한 애란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겨울이의 증언이다.
세상에 엄마만큼 속이기 쉬운 존재가 또 있을까?
거기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난 자신의 아들을 구해낸 은인이 아닌가!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한 손으로 긴 머리를 쓸어올린 여름이의 이마가 창가의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곧이어 그녀의 검지가 나의 미간을 가리키며 내 눈을 사시로 만들어 버렸다.
"니. 네. 엄. 마. 요."
역시 보통 놈이 아니었다.
그놈은 장차 경제학을 전공할 놈으로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선 친구도 팔아먹을 놈이다.
생각해 보니 나와 여름이가 사귀는 것을 이렇게 쉽게 허락한 것도 뭔가 계산이 있을 것이다.
나름 오빠라고 동생 케어하는 책임감도 떠넘길 수 있고, 무엇보다 내가 숙맥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놈이라 허튼짓을 할리도 없을 테니.
갑자기 친구에게 이용당하는 듯한 분한 마음이 일었다.
"자기 엄마한테 말하면, 가만히 두겠어? 자긴 재수해야 하는데… 아. 자기야. 오빠 산에서 굴러떨어졌을 때 그냥 놔두고 자기 혼자 가지 그랬어."
"그럼, 우리가 이렇게 만나지도 못 했을 텐데?"
"왜 못 만나? 내가 자기를 얼마나 오래... "
갑자기 자기 입을 틀어막은 여름이가 가짜 울음을 뚝 멈췄다.
"아 몰라. 이제 어떡해. 진짜 짜증 나 정말."
"저기 삐삐 없다고 우리가 못 만나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우리 커플로 하나씩 사자 알았지?"
"됐어. 필요 없어!"
그 말에 난 조금 기분이 언짢아졌다.
"아니 그게 그렇게 중요해? 언제는 나만 있으면 된다며?"
또 째려보았다. 이번엔 아까처럼 예뻐 보이지만은 않았다.
그간 내가 너무 물렁물렁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이 나의 카리스마를 보여줄 좋은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중요하다! 거기에 니가 남긴 음성 메시지가 몇 개나 들었는데 안 중요해 그럼!
오빠한테 뺏기느라 그거 다 지우는 내 기분 알기나 해? 너 같으면 안 속상해!"
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남자들이 왜 여자한테 빠져서 간이고 쓸게고 다 빼주고 패가망신하는 병신 같은 짓을 하는 뉴스가 간혹 나오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아마 지금 여름이가 돈이 필요하다면 집을 뒤져서 금이라도 훔쳐다가 팔았을 것이다.
[이쯤에서 실제로 몇 년 후 난 한 냥짜리 금목걸이를 엄마 몰래 갔다 판 적이 있었음을 고백해야겠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여름이를 껴안았다.
여름이도 나의 허리를 꼭 감싸안고 얼굴을 내 가슴에 묻었다.
겨울이가 말한 팔짱의 경고는 깨졌지만, 금이라도 갔다 팔고 싶은 심정에 친구의 경고 따윈 개에게 갔다 주겠다.
거기다 그놈이 정해준 팔짱 커트라인을 깨는 일은, 마치 금단의 열매를 깨무는 것처럼 묘한 쾌감을 주었다.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신경질적으로 놓이는 커피잔 소리와 퉁명스러운 말투가 특기인 알바생의 안내 멘트에, 우리는 움찔하며 잽싸게 손을 풀었다.
그런데, 알바생이 이번에는 쟁반을 끼고 돌아가다 말고 '휙'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되거든요?"
이번에는 여름이도 창피했는지 뻘쭘하게 한쪽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면서 알바생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조신하게 "네…" 하고 대답했다.
나 또한 잽싸게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창가에 반사되어 비치는 여름이의 뻘쭘한 모습에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야. 웃지 마."
진심으로 민망했는지, 내 등짝을 때리는 여름이의 손맛은 생각보다 매웠다.
“근데 자긴 별명이 뭐야? 오빠도 맨날 이름으로 부르던데 별명 없어?”
“뭐… 고등학생 때부터는 그냥 이름 부르게 되더라 중학생 때는 몇 개 있었지.“
”뭐였는데? 응?“
”뭐 그냥 이름이 여자 같다고 지지배라는 것도 있었고 생일 때문에 유관순, 삼일이…“
마지막 별명을 듣자마자 여름이가 말을 가로챘다.
”어머… 나두 나두 8월 15일 광복이. 히히히… 그러고 보니 우리 애국 커플이네 삼일절 삼일이, 광복절 광복이.“
”하하하. 그러네 우리가 애를 낳으면 아주 애국 열사 되겠네 크크크“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되돌릴 수 없는 침묵으로 이어졌다.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얼굴이 붉어져서 동시에 커피를 들이마시고, 동시에 “앗 뜨거”를 외쳤다.
동시에 떨어트린 커피잔에서 쏟아진 커피가 테이블에 번지는 걸 보다가 그만, 둘 다 동시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유리 테이블에서 알바가 유령이 되어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행주 가져다드릴게요."
알바생은 한심하다는 듯 우리를 흘깃 내려보고는 퉁명스럽게 말을 던지고 지나갔다.
행주로 천천히 테이블을 닦으며 우린 멋쩍은 듯 작은 소리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겨울이는 맨날 썸머라고 하던데…”
“… 그치… 친구들도 보통은 그렇게 부르고… 아주 친한 친구들은…“
“나도… 이제는 뭐 다 이름 부르지… 별명은…”
그 순간, 난 그녀의 별명을 그녀가 좋아하는 헤이즐넛 커피의 ‘헤이즐’이라 붙여주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난 한 번도 그녀를 별명으로 부르지는 못했다.
어떤 것들은 미루기엔 너무 빨리 사라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삶이 알려준 작은 팁이었다.]
‘안녕, 헤이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