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화들짝 놀라 그만 손을 놓쳤다.
온장고 안쪽 깊숙이에 캔커피를 조심해서 꺼내던 참이었는데, 앞쪽에 진열해 놓은 다른 캔음료들까지 우르르 쏟아져 굴렀다.
“앗. 젠장.”
난 놀란 토끼 눈으로 황급히 쪼그려 앉아 흩어진 것들을 정신없이 가슴에 품다가 그만 '툭' 하고 앞사람 무릎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미처 고개를 들 생각도 못 한 채, 마지막으로 굴러가는 캔커피를 주워 담고자 뻗은 손이 또다시 무릎에 막혔다.
’어? 브라운 앵클부츠... ‘
이내 인형 뽑기 크레인 집게처럼 내려와, 마지막으로 굴러간 캔 커피 하나를 집어 드는 하얀 손가락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왜 불렀는데 대답을 안 해?"
고개를 숙여 빤히 나를 내려다보는 붉은 입술과 커다란 눈, 그리고 얼굴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는 늘어트린 검고 긴 머리칼.
“악!”
순간 귀신인 줄 알고 식겁하는 바람에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주워 담은 캔음료들이 다시 쏟아졌다.
"어머머! 야. 괜찮니?"
이번엔 그녀가 황급히 쪼그려 앉아 허둥대며 캔음료 들을 줍기 시작했다.
난 그런 그녀를 멀뚱 쳐다보며, 엉뚱하게도 계란을 사러 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 불렀어… 요?"
"그럼.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니?"
캔음료 들을 다 주워 담은 그녀의 품은, 온장고에서 나온 것들 때문인지 따뜻해 보였다.
난 그녀의 말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나를 째려보던 카운터 직원과 눈이 딱 마주쳤다.
뜨끔한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음료들을 집어넣기 위해 그녀의 가슴으로 손을 뻗었다.
"내가 할게."
그녀가 움찍 거리며, 급히 단호하게 반응했다.
아차 싶었다.
난 망치를 피하는 두더지처럼 잽싸게 두 손을 등 뒤로 빼냈다.
그녀는 말없이 음료들을 정리하더니, 짧은 미소와 함께 캔커피 두 개를 내 앞에서 살짝 들어 올렸다.
나는 얼른 계산을 마치고 병원 매점을 빠져나왔다.
그녀가 커피를 건네줬을 땐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피해서 집어 들었다.
얼굴을 똑바로 보진 못했지만, 숨이 섞인 그녀의 짧은 웃음이 들려왔다.
"너 여정이지? 오 여정"
커피 캔을 따며 그녀의 물음에 반사적으로 답을 하려던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모든 상황이 평소와 다를 것이 없이 평범해 보였다.
난 그제야 지금 상황이 나로서는 상당히 기분 나빠해도 될만하다는 것을 확신했다.
"저기 있잖아요. 자꾸 반말..."
내 입이 벌어진 채로 멈췄다.
앞에 서서 나를 빤히 쳐다보며 내 말을 듣는 그녀의 얼굴이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까의 펑크족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예쁘고 커다란 눈이 끝나가는 신호등처럼 천천히 깜박거렸다.
언제 빗었는지 곱게 정돈된 머리칼은, 겨울바람에 덜컹거리는 디즈니 동화 속 여닫이 창문처럼 그녀의 하얀 귀를 살짝 드러냈다 덮었다를 반복했다.
붉은 립스틱은 한 번도 번진 적 없다는 듯 새침하게 다시 입술만을 생기있게 물들여 놓았고, 추위에 창백해진 뺨은 시리도록 아름답다는 말을 어렴풋하게나마 전달하고 있었다.
"응? 뭐... 그럼 너도 해. 우리 어차피 같잖아…응?"
그녀는 한쪽 눈을 살짝 치켜 올리며, 왼손 검지를 까딱거려 나와 자신을 번갈아 가리켰다.
"저기... 그래도 내가... 그쪽 오빠 친구로서... 그..."
"오빠?... 풉... 오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야. 내가 걔보다 5분 늦게 태어났다고 자꾸 오빠 행세하려고 그러는 것도 그냥 아빠 때문에 참고 있거든?… 아 생각하니 또 열받네… "
"뭐. 그건 들어서 아는데요... 그래도 그 서열이라는 게... "
"너 생일 3월 1일이잖아?"
그녀는 약간 당황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네?… 어? 그걸 어떻… "
그녀가 내 말을 다급히 막아섰다.
"어... 너… 너… 빠른이잖아 그치?"
난 다시 얼어붙었다.
그녀의 공격패턴은 분명 급조된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략가였다.
3월 1일생 까진 1년 빨리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입학 제도가 내 인생에 문제가 생긴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적당한 대처법을 생각해 내지 못한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감지하고, 잽싸게 고개를 돌려 발길을 재촉했다.
그녀는 좀 전에 매점에서 넘어진 나를 내려다본 귀신같이 낌새를 눈치채고 쫓아왔다.
"야! 너 그럼 나보다 거의 7개월이나 동생이잖아. 근데 무슨 반말 어쩌고... "
"아얏!"
나의 급정거에 그녀는 내 등에 코를 들이받았다.
“야. 갑자기 멈추면 어떻게 해”
코를 감싸 쥔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들 사이로 새어 나온 입김들이 그녀의 눈빛을 안개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 신비한 분위기는 마치 나를 홀리려는 마녀의 주술처럼 느껴졌다.
"저기. 그냥 서로 말 안 놓기로 하죠. 됐죠?"
"아니."
"저기... 내가 빠른 은 맞는데, 몸이 아파서 1년 휴학을 한 적이 있거든요."
"피... 거짓말"
"아니 진짜. 내가 고등학교 입학하고 몸이 아파서 1년을... "
‘아차! 얘는 겨울이 동생이잖아. ‘
난 겨울이와는 중학교 때부터 동창이었다.
어설픈 거짓말이 부른 얼굴의 열감이 다시 피어오르고 있었다.
“너 지금 내가 그 말을… “
끼이익. 마침 집에 가는 버스가 도착하는 바람에 그녀의 말이 끊겨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난 잽싸게 올라탔다. 어서 빨리 이 블랙홀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래도 지인이니 창문으로 쿨하게 인사쯤은 해주고 싶어서 창문 밖을 내다보았지만, 좀처럼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안 앉아?“
난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우린 서로를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한순간에 의문이 풀렸다.
그녀는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겨울이와 나는 당연히 같은 동네 살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멍하니 서 있는 나를 지나쳐가며 불쑥 내뱉은 그녀의 속삭임이 수영장 물처럼 꿀렁 하게 귓속에 들어왔다.
"누나라고 불러."
그녀는 태연하게 목도리를 풀며 뒷자리 2인석 창가 쪽에 앉아 나를 쳐다보았다.
난 이 많은 빈자리 중 어디에 앉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천천히 손잡이를 옮겨 잡으며 그녀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아니... 겨울이랑 나랑 친군데, 그 동생한테 누나라고... "
탁탁. 그녀가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앉아서 말해. 빈 버스에서 서서 뭐 하니?"
어쩌면 그 순간 잠깐이지만, 이런 누나가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머쓱해하며 옆자리에 앉았다.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차콜 색 울 코트 사이로 하얀 그녀의 다리가 새어 나왔다.
심장이 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아까 보았던 그녀의 치마 속 모습까지 뇌에서 연쇄작용을 일으키며 심장에 펌프질을 해댔다.
"잘 봤니?"
지그시 창문 밖을 응시하던 그녀의 시크한 한마디가 내 머리를 폭파시켰다.
"보긴 뭘... 뭘 봐!"
깜짝 놀란건 그녀뿐이 아니었다.
승객 모두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선 나에게 ‘미쳤나 보다’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 수능 잘 봤냐고... 너 왜 그래...?"
신호가 바뀌었는지, 멈춰 있던 버스가 급작스레 출발하는 바람에 반동으로 중심을 잃은 나는 그만 ‘우드득, 털썩' 고개가 꺾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머! 야. 괜찮니!"
순간적으로 몸을 움직여 내 꺾인 머리를 들어 올리려는 그녀의 다급한 행동과 걱정의 눈빛을 보았을 때, 난 비로소 오늘의 모든 기이한 상황들에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우린 서로의 인생 그래프 안에서 서로에게 닿아있는 희미한 점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지금의 버스 급출발로부터 우리의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 있다면,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서로를 향해 다가온 모든 과정에 단 하나의 오차도 없었다는 사실에 경악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운명‘은 과장된 형태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다.
우린 서로가 태어난 이래 가장 가까이서 마주한 채, 잠시 서로의 눈 속에 담긴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나의 첫사랑은 1995년 겨울, 내 눈앞에 닿을 것 같은 그녀의 ‘진짜’ 속눈썹처럼 가늘게 떨리며 시작되고 있었다.
"너 그거 알아?"
"응?... 뭐 또...?"
난 또 누나 어쩌고 하는 소리가 나올까 봐 지레 방어적이 되었다.
하지만, 그 불안함은 그녀답지 않게 수줍은듯한 표정과 말투의 대답으로 인해, 곧 설렘으로 대체되었다.
"나 사실... 어제 한숨도 못 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말이 사실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는 내 어깨 쪽으로 고개를 떨구며 잠이 들어 버렸다.
그 덕에 느슨한 브이넥 니트의 틈으로 보이는 그녀의 속살을 조금 보기도 했고, 거기에 어떤 불순한 생각이 완전히 배제됐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보다는 따뜻한 캔음료를 품에 안지 않아도 그녀는 따뜻하고 포근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나 또한 그 생각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긴장이 풀리며, 그녀의 머리 쪽으로 천천히 고개가 떨어지고 있었다.
"어이 학생들. 여기서 자면 안 돼. 얼어 죽어."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소리에 우린 결국 버스 종점에서야 눈을 떴다.
아니나 다를까.
놀라서 고개를 쳐든 그녀의 정수리가 내 코를 들이 받았다.
“악!”
“어머머! 야. 괜찮니?”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날만 이 똑같은 질문을 세 번은 들었던 것 같다.
‘난 정말 괜찮은 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