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재가 시험이면, 나도 시험 기간이거든!"
"이게 어디서 오빠한테 재재 거려! 혼날래? 여정이도 왔는데 듣겠다. 어서 갖다주고 너도 공부하면 되잖아."
1990년. 중학교 3학년 시험기간.
겨울이 집에서 밤샘 벼락치기 모드에 돌입한 나는 아래층 거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괜히 숨을 죽였다.
"야. 어서 치우자. 이번에 또 걸리면 진짜 작살 난다."
겨울이의 말대로라면, 잠시 후 ‘벌컥’ 문이 열리고 공부 상 가운데 신경질적으로 놓이는 간식 접시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겨울이는 보고 있던 일본 인기 여배우 '미야자와 리에' 누드집을 잽싸게 방석 밑으로 쑤셔 넣었다.
능숙하게 수학 참고서를 펴고 노트에 공식들을 열심히 써 나가는 척을 했다.
정작 당황한 쪽은 나였다.
황급히 이어폰을 빼고 공부 포즈를 잡았다.
겨울이가 속사이듯 꿀팁을 전했다.
”야 문 확 열려도 못 들은척해. 공부에 초 집중하고 있는 척 알지?“
발소리가 2층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3… 2… 1…
똑똑똑.
노크라는 색다른 패턴에 겨울이는 적지 않게 당황한 눈빛을 보였다.
"오빠~ 들어가도 돼?"
다정한 목소리.
연타 공격에 겨울이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고 다시 ‘공부 척’ 모드를 가동했다.
들어오라는 말은 없었지만, 스르륵. 문이 열렸다.
코코아와 쿠키가 담긴 간식 접시가 ‘딸각’ 하는 소리만 남기고 책상 한가운데 사뿐히 내려앉았다. 모든 예상이 무너졌다.
"어? 언제 왔어? 공부하느라 몰랐네. 어우 고개야"
겨울이의 능청도 능청이지만, 문제는 역시나 나였다.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겨울이가 무조건 들어야 한다며 건네준 이어폰에는, 여자의 야한 신음 소리가 어떤 리듬에 맞춰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아는 양아치 선배 새끼 하나 있는데, 거기 패거리 한 명이 친구들이 존나 안 믿어주니까, 하면서 직접 녹음했데. 크크 이 새끼 미친 새끼 아니냐?”
때문에 아직 몸의 변화가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은 상황에서, 난 점점 더 새빨개지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국사책에 얼굴을 뭍을 판이었다.
"오빠. 엄마가 간식 먹으면서 하래. 친구분도 드시면서 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고개는 차마 들지 못하고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어... 그래. 아우 그래야겠다. 너무 집중해서 풀었더니 어깨가 뻐근하네. 야. 먹고 쉬었다가 하자"
"근데 오빠?"
"어!... 어. 왜?"
"우리 수학 시험은 그저께 끝났거든?"
"응?"
급히 엄마를 부르려 뛰어나가던 그녀의 발목을 겨울이가 다급히 잡아챘다.
‘꽈당!’ 소리와 함께 넘어진 그녀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겨울이는 재빨리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
순간, 둘 사이에 복잡한 눈빛이 오갔다.
그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이는 마치 연행이라도 하듯, 그녀의 손을 등 뒤로 돌려잡고 천천히 베란다 쪽으로 끌고 갔다.
[나중에 겨울이에게 들은 바로는, 그녀에게 자기 최신형 소니 워크맨을 빼앗겼다고 한다.
겨울이는 얼마 전 ‘이상한 거’ 보다가 걸린 전적이 있어서, 엄마가 또 방을 뒤질까 봐 덜컥 겁이 나 무조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한 번만 더 걸리면 아빠한테 일러버리겠다는 무시무시한 조건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미친년. 오빠 오빠 거릴 때부터 알아봤어야 되는데… 씨발 넌 내일 국사 시험인 거 어떻게 알았냐?"
"응? 이거 니 책인데?"
"썅! 어쩐지. 아까 분명히 펴놨었는데."
나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겨울이가 다급하게 권한 정체불명의 카세트테이프를 듣느라 가방은 아예 열어보지도 못했었다.
여름이가 중학생 때의 기억을 꺼내든 것은 커피전문점에서 주문을 마치고 난 후였다.
"기억나 그때? 너 되게 귀엽더라. 날 쳐다보지도 못하고 얼굴은 빨개져서는. "
"어! 어... 그게... 내가 좀 내성적이라... "
그 말 자체는 사실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변명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그 음란한 테이프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그녀를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나에 대한 귀여운 첫인상을 굳이 망칠 필요는 없으니까.
"알아. 오빠… 아니 겨울이가 그랬어. 여정이 그 새끼… 아니 걔, 여자가 먼저 덮치지 않으면 평생 혼자 살 거라고. 완전 쑥맥. "
"뭐? 무슨 소리야. 난... "
딸그랑.
유리 테이블 위에 커피잔을 내던지듯 내려놓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커피숍 알바생의 퉁명스러운 안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내 반론이 끊긴 것은 다행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여름이가 즉각적으로 컴플레인을 쳤다.
"죄송합니다. 손이 미끄러져서요."
"좀 조심해 주세요!"
"네~ "
퉁명스러운 대답.
여름이가 신경질적으로 째려봤음에도, 알바생은 알 바 아니라는 듯 커피 쟁반을 겨드랑이에 끼고 휙 돌아서버렸다.
우린 잠시 서로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오빠. 아니. 오빠. 아니 아니. 너. 재 알아?"
"아니?"
"재 왜 저래 근데?"
"글쎄. 나도 잘...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나 본데? "
"아니. 그게 말이 돼? 무슨 일을 이렇게 해. 열받아. 가서 따져야겠어"
그 순간, 언젠가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들었던 사연이 떠올랐다.
나는 서둘러 카리스마 있게 손을 올려 그녀를 막아섰다.
"아니야. 넌 가만있어. 내가 따지고 올게. 저기요? "
라디오 사연처럼, 여름이는 나를 붙잡았다.
‘이게 진짜라고?‘
솔직히 순간 식은땀이 났다.
카운터까지 가서 알바생한테 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몰랐으니까.
"아니야 자기야. 아니. 오빠. 아니 아니... 야... "
정말 뜻밖이었다.
가끔 정신줄을 놓았을 때 ‘오빠‘ 소리가 튀어나온 적은 있어도,
‘자기야‘라는 단어가 나온 건 처음이었다.
여름이 스스로도 놀랬는지 잠시 멍하니 나를 쳐다보다가, 곧 자신의 하얀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걸 알았는지 얼른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슬쩍 그녀의 어깨를 건드리며 장난을 걸었다.
"저기... 방금 뭐라고…? "
"됐어. 커피나 마셔. "
“아니 니가 지금 분명히… ”
여름이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고 필사적으로 내 말을 막았다.
“야. 너… 너 거기 그거… 이상한 거 보더라?”
“응?”
“내가… 내가 다 들었거든? 그때 병원에서?”
여름이가 눈을 내리깔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난 잠시 멍한 눈으로 여름이를 쳐다보며 머리를 굴려보고 있었다. ‘병원에서?… 이상한 거…! ’
“아! 아… 아니야 그거. 그거 그… 겨울이가 그거 자기 독서실 가서 가져와… ”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그때 겨울이가 간호사 누나 기다리는 걸 어떻게 알고 형으로 바꿔달라고 했을까?
“너 그때 안 나가고 다 엿듣고 있었어?!”
“뭐?… 엿듣긴 누가… 발이 아파서 잠시 문에 기대… 아 몰라 지금 그게 중요해? 너… 그 이상한 거… “
”손님. 좀 조용히 해주시겠어요? 여기 두 분만 있는 거 아니거든요?“
알바생이 우리 쪽을 지나가다 흘깃 내려다보며 툭 쏘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름이와 난 서로 멍하니 마주 봤지만, 머릿속은 분명 달랐음이 확실했다.
난 여름이의 눈빛이 점점 ‘빡’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난 또 동체시력 모드가 됐는지, 이어서 여름이가 무릎에 올려 둔 니트 카디건을 내팽개치며 벌떡 일어서는 모습이 느린 화면처럼 보였다.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야! 너 뭐야!”
여름이는 카운터 쪽을 향해 손가락을 뻗으며 성큼 걸어갔다.
하지만 알바생이 가방을 둘러맨 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휙 나가버리자, 딸랑 거리는 처마종 소리만 답으로 돌아왔다.
“야! 너 어딜 도망가? 이리 안 와!”
시선이 쏠렸다.
교대한 알바생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난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문에 기대 있었다고? 그 문?‘
여름이랑 내가 그날 같은 문에 같이 등을 기대고 있었다는 게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어쩌면 여름이도 나처럼 심호흡을 내쉬고 다리가 풀렸을까? 내가 여름이 때문이었던 것처럼, 여름이도 나 때문에…?
털썩.
내 상상을 깨트리며, 여름이가 다시 옆에 앉았다.
”뭐 저런 게 다 있지? …야. 너 솔직히 말해. 너 저 알바 애 알아 몰라?“
”어? 모르는 분이야“
”뭐? 분?“
”아니… 모르는 년이야“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이런 표현을 쓴다는 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사실이었다.
난 아는 여자라곤 생물학적으로 굳이 따질 경우 엄마 밖에는 없었으니까.
문득 조금 전에 겨울이가 나에 대해서 했다던 얘기가 떠올랐다.
“걔 여자가 먼저 덮치지 않으면 평생 혼자 살 거라고…”
‘혹시, 얘는 나를 덮쳐줄까?… ’
난 나도 모르게 그만 짜증 나 있는 여름의 어깨에 손을 얹고 천천히 내 품으로 당겼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그녀의 표정이 정말 눈 깜짝할 새 수줍음으로 바뀌었다.
“아이 뭐야… ”
그녀의 몸은 자연스럽게 나의 어깨로 기울었다.
난 그녀가 기댔던 그때의 입원실 문이 되었다.
난 다른 쪽 팔까지 마저 올려 여름의 반대쪽 팔을 감싸고 깍지를 걸쳐 넉넉하게 안았다.
도대체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받아줄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그녀의 머리칼에서 나는 헤이즐넛 향은 아마도 손에 들린 커피 때문이지만 이젠 그녀의 향기가 되었다.
우리는 잠시 동안 말없이, 어둑해진 저녁 커다란 통유리창에 비치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서로 미세한 떨림을 느낄 만큼 예민하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중학교 시험기간에 들었던 음란한 테이프 소리나, 누드집이 주는 저급한 흥분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셰익스피어를 아무리 뒤져본다 한들 이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을 것 같았다.
[난 이 표현이 완전히 오만했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그땐 셰익스피어를 읽어보기 전 이었다.]
"너. 뭐... 아주 쑥맥은 아니네."
"어? 어. 그게…아마. 니가 ‘자기야~’ 하고 불러주니까…"
"쳇. 나 그런 말 한적 없거든?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음악이나 듣자 이어폰 줘봐."
여름이는 여전히 내 품에 기대어, 한쪽씩 나눠 낀 이어폰에서 흐르는 유재하의 '우리들의 사랑'을 작은 목소리로 따라 부르고 있었다.
'그 입술로 말해보세요. 오래전부터 나를 사랑해 왔다고... '
그리고,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긴 했지만, 난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눈이 왔으면 좋겠다... 자기야."
난 이번에는 그 말을 가지고 장난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상황에서 입 밖에 내서는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그 애.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