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때려줘서 고마워

by 스투키


“절대 안 돼! 자기 또 떨어진단 말이야. 걔랑 같이 있으면 공부할 수가 없어. "


"그래도 이미 겨울이랑 같은 학원 끊기로 벌써 다 말해 놨는데, 어떻게 의리 없이 혼자만 다른 학원 다녀?"


"의리가 밥 먹여줘? 내가 걔를 몰라? 절대 안 돼!"


"내가 진짜 공부 열심히 한다니까. 그놈 꼬임에 안 넘어가고. 약속할게 자기야. "


"안된다면 안 돼. 나랑 헤어지고 싶어?"


여름이는 막무가내였다.

처음 겪는 사랑과 우정 사이의 갈등에서 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난 그런 나 자신에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우정이란 것이 사랑에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다니, 언제나 친구가 먼저일 것 같았던 사나이의 우정은 판타지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실 친구들과의 약속 때문만은 아니었다.

변화라는 게 나로서는 두려운 일이기도 했다.

겨울이처럼 사회성이 몸에 밴 놈이랑 붙어 다니면, 그나마 좀 더 적응하기가 쉬울 터였다.

누군가에겐 어깨의 먼지를 떨어내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 내겐 혀끝으로 팔꿈치를 핥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자기야 그러면, 이렇게 하자. 내가 한 달만 같이 다녀보고 그래도 성적이 안 오르면... "


"쉿."


갑자기 내 입술로 날아든 여름이의 검지로 인해 내 코가 돼지코가 되었다.


"자기는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이 누나만 믿어."


당시 유행하던 일명 ‘돼지기름 립글로스’를 바른 그녀의 반짝이면서 도톰한 입술에서 나오는 뭔가 언밸런스한 문장이 꽤 섹시하다고 느껴졌다.


‘언젠가 저 입술의 립클로스가 내 입술에 뭉개질 날이 올 것이다!’


여름이는 내가 대학에 붙기 전까지 키스는 절대로 안 된다고 했지만, 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가 우리 100일째 날에 대한 기대를 이야기하던 중,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겨울이가 그녀의 각본대로 움직였다.


"야. 씨발 미안하게 됐다."


겨울이가 THIS 담뱃갑 비닐을 뜯으면서 어울리지 않게 사과를 건넸다.


"어? 뭐가?"


"너랑 같은 학원 못 다닐 거 같다. 아빠가 경기도 어디에 있는 무슨 씨발 기숙 학원인가 뭔가 가래. 스파르타식 무슨"


겨울이가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야! 그런 게 어딨어~? 같이 가기로 약속해놓고. "


능청을 떨며 대답하긴 했지만, 이것을 뒤에서 기획한 여름이가 마치 왕비의 숙청을 대신들에게 사주하는 후궁처럼 느껴져 섬뜩했다.

혹시 언젠가 그녀에게 새 남자가 생긴다면, 나를 어쩌지도 못하게 외딴섬으로 보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니 여자친구 년께서 엄마한테 개 지랄을 떨어서 이렇게 된 거 아냐. 혹시 니가 시켰냐?"


"어. 내가 시켰어."


"하긴. 니 머리에서 나올 시나리오가 아니지. 아 좆됬네. 기섭이랑 나이트클럽 존나게 다니기로 했는데… 야. 근데 너 라이터 있냐?"


“아니 없지.”


“시발 넌 있는 게 뭐야!”


갑자기 삐삐가 울려 확인한 겨울이는 급히 공중전화를 찾아 떠났다.


“야. 일 있음 삐삐 쳐. 번호는 알지?”


빈 기섭.

고등학교를 재수하고 들어온 친구다. 자기 말로는 결핵으로 1년 휴학을 했다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학년은 같았지만, 실질적으로는 나보다 2살이 많았기 때문에 겨울이와 같이 있지 않을 땐 왠지 모를 서먹함이 있었다. 그러므로 기섭이랑만 같은 학원에 다니는 것이 조금 꺼려지긴 했지만,

또 친한 것은 맞기 때문에 다른 학원에 가는 것도 웃겼다.

사실 여름이는 기섭이도 탐탁지 않아 했는데, 내가 이과로 전향해서 같은 반에 들어갈 일은 없다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야. 너 왜 이과로 바꿨어?"


"어. 뭐. 그냥 앞으로는 이과 쪽이 비전이 있다고 하니까 한 번 바꿔보는 거지."


"남자들 틈에서 썩은 내 나서 공부 되겠냐? 비전은 여자가 비전이지.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여자랑 한 반에서 공부해 보겠냐? 아. 생각만 해도 씨발 흥분되네"


"어. 뭐 그래도 그냥... "


"아 맞다. 넌 여자친구 있지? 야. 근데 걔 따먹어 봤냐? 졸 탱글탱글하게 생겼던데."


"뭐? 이런 씨발놈이! 그게 친구 동생한테 할 소리냐 개새끼야!"


물론, 곧잘 하는 농담들이었다.

거기다 기섭이는 방금 전까진 아직 내 여자친구가 겨울이 동생인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 역시도 친구들과 여자들을 향한 저속한 농담들에 웃고 떠들던 놈이었으므로, 지금 내 반응이 이율배반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원래 인간은 모순 빼면 시체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확실히 살아있었다.

나는 너무나 인간적이라, 순간 치미는 화를 참아낼 만한 이성이 없었다.


"야. 왜 그래?"


"왜 그래는 씨발! 맨날 이상한 거 쳐 보니까 돌았나 이 새끼가! 너나 여자 팬티 훔쳐보고 딸을 치던가 씨발새끼. 한 번만 더 개 병신 같은 소리 했다간 씨발 대갈통을 확!"


나의 올라가는 무릎에 움찔한 기섭이는 잠시 멍하게 나를 쳐다봤다.

사실 나도 이런 자신에 놀랐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친했던 친구와 크게 싸우고 나서 집에 돌아와 밤새도록 울고 난 이후 한 번도 누구와 싸우거나 혹은 심한 화를 내본 적도 없었다.

애들은 싸우면서 친해진다고 하지만, 난 그 친구와 다시 친해질 수가 없었고, 우리는 결국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멀어졌기 때문에 그것이 어쩌면 나에게 상처로 작용했을지도 몰랐다.


역간은 상기된 상태로, 뒤돌아서 혼자 학원을 빠져나가는 내 등에 기섭이의 날아 차기가 꽂힌 모양이다.

중심을 잃고, 앞으로 꼬꾸라진 내 주위로 몇몇 여학생들의 비명과 함께 학원을 등록하던 학생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나. 이 새끼가 처 돌았나! 맨날 웃으니까 누굴 병신으로 아네"


기섭이의 구겨진 자존심이, 넘어진 내 등 뒤에 박혔다.


아마도 주위에 몰려드는 사람만 없었다면, 나나 기섭이나 그냥 지나갔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관중들은 몰려드는 바람에, 물러설 수 없는 이 빌어먹을 남자의 자존심은 고개를 들고 말았다.

난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메고 있던 백팩과 점퍼를 벗어 땅바닥에 집어던졌다.


거의 6년 만의 싸움이었다.

심장은 거칠게 뛰고, 눈빛은 살의로 변했다.

천천히 후드티 가슴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떨어내며 녀석의 빈 곳을 빠르게 캐치하고 있는 나의 눈에 기섭이의 꽉 쥔 주먹이 보였다.

쏜살같이 날아가는 나의 주먹은 정확히 녀석의 얼굴에 꽂혔지만, 대신 기섭이의 무릎이 내 창자를 강타했다.


사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어차피 맞던지 때리던지, 싸울 당시에는 그것이 아픈지도 잘 못 느끼는 법이다.

그것은 구경꾼이 보기에도 제법 괜찮은 그림이었다.

어차피 같은 학원을 다닐 애들인데, 이런 강렬한 첫인상도 나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소위 진흙탕 싸움은, 우리 이미지를 왜곡시킬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다.

우린 둘 다 자빠져서, 서로 머리끄덩이를 잡거나, 깊은 물속에 빠진 애들처럼 허우적대며 어림짐작으로 서로의 얼굴을 가격해 보려 애쓰고 있었다.

난, 손을 뻗어 벗겨진 운동화를 집어 들고 기섭이 머리를 가격하려고 했다.

심지어 기섭이는 내 허벅지를 꼬집기까지 했다.


"쫌 쪽팔리지 않았냐?"


노량진 뒷골목 계단에 앉아 88라이트 담배를 꼬나 문 기섭이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쫌? 그러게 왜 자빠뜨리고 지랄이야. 그냥 일어서서 싸웠으면 좀 나았을 텐데."


"그럼 병신아 미끄러졌는데, 나만 넘어지면 불리한데 어떡해 그럼"


“일어나면 되지 새꺄. 설마 내가 넘어진 너를 밟겠냐?”


"병신. 킥킥 킥... 야. 근데 너 라이터 있냐?

아 맞다. 너 담배 안 피지."


앞으로 다닐 학원에 '덤앤 더머' 이미지를 심어주었다는 것에 기섭이는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여자애들이 날 좆밥으로 보면 어떡하지. 씨발"


[정말이지 지금처럼 스마트폰과 CCTV가 난무하는 시대가 아니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만일 그랬다면 지금쯤 유튜브에 '좆밥들 싸움'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으로 남아 영원히 온갖 조롱에 시달렸을 수도 있다.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창피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어린 시절에 첨단 디지털 장비를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다.

우린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을 회상하곤 한다. 어차피 증거가 없으니 우리의 희미해진 기억력에 더해진 상상력으로 그때의 '덤앤 더머'가 아닌 화려한 액션의 주인공으로 탈바꿈 된다.


"야. 겨울아. 그때 내가 날아 차기로 저놈 명치를 정확히 날려버리니까 여정이 저 새끼가 아파서 뒹굴뒹굴 구르길래,

내가 다시 정신 차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줬지 좆밥새끼. 그러니까 옆에서 여자애들이 멋있다고 막 소리 지르고... "


"미친놈. 겨울아 저 말을 믿냐? 너 나 특공무술 배운 거 알지? 그냥 돌려차기 한방에 나가떨어졌지. 너 공각기동대 돌려차기 알지? 그게 그때 감독이 한국 왔다가 나 보고 영감을 얻은 거잖아. 저 새끼 그때 죽을뻔했어."


“오시이 마모루가 노량진 재수학원을 왜 와 병신아. 킥킥 킥”


여하튼, 애들은 싸우면서 친해진다는 어른들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우린 서로 사과를 했고, 내가 여름이 대학 입학 선물을 살 때는 남자다운 통을 보여줘야 한다며 거금을 빌려주기도 했다.

물론 녀석은 여성 성감대 강의도 빼놓지 않았다.]


"자기야! 입술 왜 이래! 어디에서 넘어졌어? 조심해야지 겨울이라 미끄러운데."


"뭐. 별거 아냐... 그냥 누구랑 좀 싸웠어. 시비가 붙어서... "


"뭐? 싸워?"


여름이가 깔깔대기 시작했다.

나름 터프하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살짝 입가에 손을 갖다 댔는데, 까진 부분에 닿는 바람에 찌릿한 쓰라림에 눈을 찡그리고 말았다.


"아이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자기가 이 정도면, 그놈은 아주아주~멀쩡하겠네?"


"아 진짜라니까. 어떤 양아치 새끼들이 자꾸 삥을 뜯을라 그러잖아."


"그래서, 돈도 주고 얻어맞기까지 한 거야?"


도무지 그녀는 내가 싸웠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기섭이와의 쪽팔린 일을 사실 그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나름 폼을 잡아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인식한 나는 그냥 포기했다.


"쩝. 그래. 사실 엎어졌지. 그냥 좀 멋있게 싸운 걸로 믿어주면 안 돼?"


여름이는 약간은 걱정된 눈빛으로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며, 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내 입가의 상처를 만져보았다. 손길이 닿을 때마다 아까와 같이 찌릿한 쓰라림이 느껴졌지만 남자답게 참았다.

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름이의 손가락을 치워내기 위해 손을 올리며 말했다.


"괜찮아. 그냥 살짝..."


따뜻하고 부드러운 여름이의 입술이 내 입가의 상처에 닿았다.

그녀의 짧은 입맞춤이 끝나자, 난 그 상처를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지그시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은, 분명 나에게 ‘지금이야. ’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난 더 이상 숙맥이고 싶지 않았다.


우리의 첫 키스는 그녀의 다짐보다도, 또 나의 예상보다도 더 빨리 찾아왔지만, 서로 그것을 후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결국 오늘의 모든 사건들도 그저 우리를 향해 달려왔을 뿐이었다.


나를 때려준 기섭이가 고마웠다.

녀석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오늘 싸움의 진정한 승자는 나였다.


한쪽 어깨에 걸쳐있던 백팩은 사뿐히 땅으로 떨어졌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우리의 서툰 키스가 끝났을 때, 난 이전처럼 더 이상 참아내지 못하고 결국 억누르던 말을 뱉어내고 말았다.


"여름아. 사랑해."


먼저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혹은 사랑이 뭔지 아직은 잘 몰라도 그냥. 내 인생에 타인에게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이 어색한 단어를 여름이에게 꼭 먼저, 그리고 처음으로 들려주고 싶었다.


서로를 꼭 껴안은 나의 목 위로 떨어지는 눈물이 느껴졌다.

추운 겨울이라 콧물이었을 상황도 아주 배제할 순 없었지만, 분위기상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리고 이어서 귓가를 간지럽히는 그녀의 수줍은 듯한 작은 음성이 들려왔다.


"넌 이제 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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