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책을 읽고 어쩔 줄 몰라했던 이유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천천히 넘긴 후에야 비로소 느꼈습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나서, 이 책을 집어든 것은 마치 운명과 같았다고 말이죠.
주인공 이시가미의 마지막 그 맹렬한 포효가 계속 귓가를 맴돌았습니다.
우우우우우,
짐승이 포효하듯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히가시노 게이고.
이 수준 높은 작가는 밀당의 고수처럼,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저를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무책임하게 던져놓은 이 잔혹하고도 정교한 딜레마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요?
전 이 책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져야 할까요?
유가와, 이시가미, 구사나기, 이 세 명의 주요 등장인물은 확고하게 자기 갈길을 향해 내달렸습니다만, 전 그 충돌이 발생시킨 블랙홀에 빠져버렸습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같은 빙의(憑依)적 질문으로 접근할 수준을 넘어서게 되면서 오는 답답함에, 글로 표현해 보려 폰을 잡았지만, 여전히 커다란 감정적 여운의 일부에 머물러있을 뿐입니다.
일단 그 감정의 파편이라도 풀어보면서, 글을 이어가는 방법이 현재로서는 최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용의자 X의 헌신>은 미스터리 추리 소설입니다.
따라서, 이 책의 유명세에서 기대한 것들 또한 장르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범인과 그 상대(보통은 형사)와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정교한 트릭을 풀어가는 짜릿함, 반전의 놀람 같은 것들 말이죠.
하지만, 그것들을 모두 관통한 저의 감정의 종착지는 즐거움이 아니라 안타까움 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안타까움 조차 감정의 최종점으로 단정지을 수가 없는 게 답답했습니다.
범죄는 우발적이었지만, 그것을 돌이킬수 없을만큼 확장시킨것은 의지적 입니다.
그것은 과연 누구를, 혹은 무엇을 향한 것이었을까?
거기서부터 생각을 해야 하지만, 그조차 답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가 펼쳐놓은 정교하고 잔혹한 트릭을 푸는 열쇠는, 마치 악마를 꺼내는 무저갱(無底坑)의 열쇠와 같았습니다.
그 트릭을 풀어내는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 마나부 또한 그 사실 너머의 진실을 꿰뚫어 보았기에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 눈물은 또한 누구를 위한 눈물이었을까요?
그것은 어쩌면, 풀지 말아야 할 트릭을 풀어버린 자신을 원망하는 눈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에는 어머니를 제외하고도 범접할 수 없는 크기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세상이 주로 가상의 세계라는 것이 팩트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현실에서도 추구하거나 존재하길 기대한다는 것은, 이런 책들이 수없이 팔려나가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용의자 X의 헌신>의 이시가미도,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처럼 그런 범주의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표현방식은 개츠비와 마찬가지로 불완전했습니다.
하지만, 불완전한 세상에서는 역설적이게도 그렇지 않고서는 그것을 완전하게 드러낼 방법이 없습니다. 악(惡)이 깊을수록 그 기반 위에 더 단단하고 높은 선(善)의 구조물을 쌓아 올릴 수 있듯이, 오직 극단의 방식으로만 어떤 감정의 진폭이 세상의 표면 위로 드러납니다.
이시가미는 무표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갈등에서 수학적인 해법을 찾아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수학에도 난제(難題)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이시가미의 삶이 아무리 최선의 답을 찾아낸 합리적이고 명쾌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에게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고독과 사랑의 감정들은 난제였습니다.
그것이 그가 죽으려던 이유이자, 동시에 살아야 했던 이유였습니다.
그가 난제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너무나 명확한 상수였던 것입니다.
그는 ‘야스코’라는 상수를 획득했고,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이 죽은 것과, 법과 제도의 불완전함에 관한 문제를 명쾌하게 풀어갔습니다.
너무나 명확했기에, 그는 그 절댓값을 붙들기 위해 방정식에 대입해야 할 잔혹한 변수를 고를 때조차도 거침이 없었습니다.
이시가미가 붙들었던 값은 아이러니하게도 숫자가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원주율의 마지막 소수점이었습니다.
우우우우우.
이시가미의 포효는 자신이 쌓아 올린 공식이 무너져 내린 것에 대한 분노도,
또,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감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허탈함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작가의 말 그대로 새끼의 시체 앞에서 울부짖는 늑대처럼, 지켜야 할 사랑을 지켜내지 못한 절망이 낳은 울분에 찬 ‘짐승의 포효’였습니다.
그렇다고 이시가미의 해법이 옳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딜레마는 여전히 작동 중입니다.
전 글을 써 내려가며 여전히 토끼굴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지만,
그 함정이 바로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시가미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남긴 난제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시가미와 유가와의 대화에 등장하는
P .NP 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P. NP 문제’라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겠지?”
유가와가 뒤에서 말했다. 이시가미가 뒤를 돌아보았다.
“수학 문제에서 스스로 궁리해서 답을 내놓는 것과 남의 답이 옳은지 틀렸는지를 확인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간단할까를 묻는 것이잖아. 클레이 수학 연구소가 상금을 내걸고 낸 문제 중 하나지.”
이시가미는 스스로 궁리해서 답을 내놓았습니다.
이제 그 답이 옳은지 틀렸는지는 유가와와 구사나기, 그리고 저를 포함한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 것입니다.
이제야 이 책을 읽고 나서 어쩔 줄 몰라했던 저의 반응에 대한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아직도 증명하지 못한 세계적인 수학적 난제를, 숫자만 봐도 PTSD가 올 것 같은 저 같은 사람이 풀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