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恨)은 어디서 보여줘야 하나
나는 차분하게 미쳐가고 있다. 갈수록 감정의 곡선이 요동친다. 자주 절규한다.
2022년 방영된 <뮤지컬스타> 1화의 일부를 봤다. 서편제의 원망이었다. 딸이 큰 소리꾼이 되길 바라는 아버지와 그 딸의 이야기다. 그중, ‘원망’은 자신의 눈을 멀게 한 장본인이 아버지라는 사실에 절규하는 노래다. 뜨고 싶어도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검은 세상에 소리친다.
“무엇이오. 이게 대체 무엇이오. 무얼 한 거요. 내 눈이 대체 왜 이러오.”
그녀는 자신의 눈을 매몰차게 비볐고, 이내 그곳은 건조해지고 빨개졌다.
“차라리 죽이지. 차라리 죽이시오. 미워. 미워. 죽여줘요. 제발. 속에 분이 뜨거워.”
딸이 자신을 두고 혼자 갈까 두려워 망쳐버리는 아버지는 어떤 아버진가. 또,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의 손에 장애를 얻고 죽음을 원하는 비통한 딸의 삶은. 광기어린 전개와 악에 바친 목소리가 내 마음을 울렸다. 그 모습이 나 같았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잠깐 유튜브를 틀어 쉬는 중에 할 소리는 아니지만, 아무튼 나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의 한(恨)은 비밀이다. 감히 말하고 싶지 않다. 사실 무엇을 비밀로 하고 싶은지 알지 못한다. 역시 미친 거다.
나는 왜 이 장면이 그토록 공감이 되었을까.
첫 번째 이유는 이거다.
여자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분통을 터뜨리는데, 저만한 분이 내게 있음에도 엉엉 울 이유를 찾지 못해 참기 때문이다. 드라마나 영화를 잘 보지 않는 내가 요즘 들어 찾아보는 이유가 이에 있는지도 몰랐다. 울 이유가 필요하다. 슬픔은 도처에 깔려 있으니까. 출근했을 때 오늘은 인사를 안 해주는 옆자리의 사람으로 슬퍼지기도 하고, 만원인 버스에서 이러저리 몸이 치여 슬프기도 하다. 이렇게 말하면 세상은 참 살 만하지 않다.
두 번째 이유는 이거다.
나는 점화(點火)되길 원한다. 인생은 어려운데, 이제는 몇 번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보았다고 정서에 불길이 타오르지 않는다. 아끼는 초를 들고 어디서 피울지 여러 번 망설이다, 기회를 놓치고 만다. 예전엔 그렇지 않았는데. 몇 번의 불나방 생활을 하니까 이제는 나이와 함께 두려움을 얻었다. 초는 불을 한 번이라도 피우면 그때부터 그을음이 생겨 전 같은 장식용으로도 쓰기 애매하다. 그래서 이 물건이 가장 빛날 곳에서 그 힘을 보여주고 싶은데, 이러다 영영 쓸모를 잃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초는 나의 재능이다. 보여주지 않고, 실패가 없었다는 이유로 나만 나의 값어치를 비싸게 매기고 있다. 지독한 일이다. 나는 글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물론, 숙연해지기도 한다. 한 번 숙연해지면 글쓰기를 시작하는 데 꽤 긴 시간과 힘을 들여야한다. 달래주기 번거로운 재능이라고 생각하여, 상처받지 않도록 다독이는 중이다.
미운 대상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 너무나도 쓰고 싶으면서도, 자리에 앉으면 곧장 피곤함이 몰려온다. 고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음을 위해 고발할 힘은 비축하고 엉덩이를 털고 누워 내일을 위해 휴식해야 된다. 그러면 내일의 인사는 내가 먼저 건낼 수 있고, 조금 더 일찍 일어나서 여유 있는 버스에 올라탈 수도 있는 노릇이니까.
세상에 방전된 나는 무기력에 사무쳐 맥없이 기절하고 만다. 나는 여자의 분통이 부럽다. 이렇게 말하면 나쁜 일이 생기길 바라는 사람 같지만, 그게 아니라 여자의 점화(點火)가 부럽다. 무료한 일상에 순리대로 흘러가는 사람이길 바라지 않는다. 자주 충돌하고 찢는 사람이고 싶다. 그렇게 얻은 실패가 다음엔 요긴한 재료가 되기도 하는 것을 종종 보았다. 마냥 하라는 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하고 바꾸는 사람이고 싶다. 딱딱한 사무실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젤리 하나를 챙겨 설레는 마음으로 새로운 것들을 생산하고 싶다.
지금은 얄팍하게도, 나의 점화가 오지 않았다. 아직 오지 않는 점화를 기다리며 더 배우고 주변을 가꾸며 도처에 깔린 슬픔을 하나씩 지워나가려 한다. 일단은 그것으로 오늘과 내일을 매우고, 1년을 만들면 내가 바라는 점화가 오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