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은
죽어도 좋다는 신념으로
쓰디쓴 고배를 맛본 후, 검색창을 두드렸다.
진짜로 음악에 조예가 깊어지려면
오케스트라 단원을 하라고 권유하겠다.
왜냐하면 자기가 부는 소리는 물론,
남의 소리까지 폭넓게 들을 수가 있었다.
또한 지휘자 선생님의 포지션 따라서
많은 단원들과 어떻게 하면
각기 다른 음색을 맞추어 나갈 수가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느낌표를 찍을 수
있었다.
대중가요에서 맛볼 수 없는
노래 위의 날개를 달고 다이내믹한 곡들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연으로 감동을
나눌 때는 이루어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뜨거워지고 행복했었다.
사단법인 V오케스트라와의 필연으로
세컨드 바이올린과 플루트 소울 앙상블에서
멋들어지게 연주할 수 있었다.
동구에서 유명한 ㅂㅅ병원에서 사랑의 콘서트를
하기도 하였고, 모수녀님(외국인)과 이바구 동네를 담은 스토리로 연극을 가미한 오케스트라 음악으로 주민들께 감동을
선사할 때는 온 세상이 환희로 물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트럼펫을 불던 단장님이 불치병으로 인하여 공석으로 물려받을 분이 안 계셨던지 안타깝게도 어쩔 수 없이 접게 되었다.
동구청에 연습실을 두고 매주 화요일이나 목요일에
모임을 가졌던 것을 해체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말괄량이 삐삐'처럼 모험심이
가득한 아이였는데 오케스트라를 통해서
고상하고 매혹적인 소리를 자주 듣다 보니까
나 자신도 모르게 어느덧 닮아갔었다.
오케스트라도 삼 년 이상 심취하게 되면서부터
총보에 소리욕심을 드러내게 하였다.
이를 통해 점점 공연에 탄력이 붙었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으며,
시각장애우들과 부산시민회관에서
'유레이즈미업'으로 피아노 치면서 트론본주자와
노래로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과 호흡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오던 중,
또 거기서 그치지 않고 세종문화회관에서
전국 장애인의 날에 초대되어
시각장애우들과 '젊은 그대'를 한마음으로
합창을 하였다.
이런 추억들이 나에겐 보석이 되어서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현재, 에이아이곡이 대세라서 '음악시인'이자
'문화예술인'에 걸맞게 작시로
전 세계인들이 서로의 달란트를 나눌 수 있는
유튜브에 차곡차곡 싣고 있다.
그리스에서 나의 작시와 곡에 감동해서
댓글을 달아줄 때는 마음속에 잔잔한 파도가
야릇하게 밀려왔다.
나는 사실 '안방형 '스타일이 아니다.
교육이 빠지면 흐트러지기 쉬운 것을
알기에 항상 책을 가까이하는 삶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삶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악기로 힐링할 수
있었다.
나는 악기들로 단 한 번도 장난친 적이 없었다.
갓난아기처럼 신줏단지 모신 것처럼
소중하게 다루었다.
혹시라도 현이 끊어질까 봐 늘 조심했다.
그러다가 첫째 딸의 부탁으로 딸기를 마트에서
사다가 산 지 얼마 안 된 악기를 분실한 적이 있는데
얼마나' 반려견'을 잃은 만큼
슬프던지 한동안 악기연주를 못했다.
그래서 우리 악기쟁이들은 항상
꺼진 불도 다시 보는 정신력으로
악기부터 챙기는 습관이 몸에 베여있었다.
아름다운 한 세상을 지키는 힘은
'문화예술'이라고
월드빅스타디바윤 애칭을 얻은 만큼
이제는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