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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우 Mar 26. 2022

북아현동 아줌마들

자작글 <원주민의 후예> 각색

 ‘북아현동 아줌마들’ 눈에 나는 여전히 코흘리개 꼬마다. 여기서 ‘북아현동 아줌마들’이 누구냐고? 내가 나고 자란 고향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2동에 살던 여자 어른들을 말한다. 어릴 적부터 그렇게 불러서 내게는 여전히 너무나도 친숙한 이름, 입에 담는 순간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름, 그 이름이 바로 ‘북아현동 아줌마들’이다.

어떻게 이름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지냐고? 그도 그럴 것이 그분들은 내가 엄마의 뱃속에 있던 시절부터 재개발로 동네가 없어진, 15살이 되던 해까지 거의 매일같이 나를 돌봐주시던 분들이기 때문이다.     


 동네 사랑방인 미용실 집 아들이던 나는, 시장에 오고 가며 매일 두세 번씩 엄마 가게에 들르시는 ‘북아현동 아줌마들’ 품에 안겨 자랐다. 아줌마들은 동네 누나, 형들과 한참 터울이 나는 나를 유난히도 예뻐하셨다. 시장에 갈 때면 엄마의 미용실에서 홀로 아장아장 걷고 있던 내 손을 꼭 잡고 가셨다.

“뉘 집 아들이 이렇게 귀엽나, 눈이 아주 똥그랗네” 알면서도 매번 묻는 과일가게 아저씨의 짓궂은 물음에

“내 아들이지, 날 닮아 이렇게 잘났어” 아줌마들은 매번 능청스레 답하셨고 그 덕에 나는 하루에도 서너 번씩 엄마가 바뀌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엄마를 가진 아이가 되었다.     


 아줌마들의 왕언니 지물포 아줌마는 맛깔난 전라도식 겉절이를 들고, 부업으로 분식을 만들어 파시는 옆집 비디오 가게 아줌마는 떡볶이가 맛있게 되었다며 한 국자 포장해서, 옷 공장을 하시는 주연이 누나네 아줌마는 손수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낸 고구마순 김치를 담가서, 초롱이라는 이름을 가진 요크셔테리어를 키우시는 영진이 누나네 아줌마는 내가 좋아할 만한 팥빙수, 감자 샐러드, 샌드위치 등등의 간식거리를,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쯤이면 각기 바리바리 싸 들고 엄마 가게로 오셨다. 이유는 단 하나, 입이 짧은 나를 먹이기 위해서!

북아현동 꼬마를 향한 아줌마들의 정성 덕분에 우리 집 식탁에는 날마다 새로운 음식이 올라왔다.(물론 그 정성의 최대 수혜자는 늘 우리 아빠였다는 건 아줌마들께 여전히 비밀이지만)     


 동네 곳곳에 엄마들을 둔 나는 아주 천방지축으로 자랐다. 나이 많은 형들을 제치고 늘 골목대장 자리를 도맡았다. 나이도 어린 내가 자신들을 이리저리 이끌고 다니는 것이 마뜩잖던 형들이 나를 몇 대 쥐어박을 때면, 나는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다. 왜냐하면 그 울음을 듣고 언제나 내 편인 아줌마들이 달려와 형들을 혼낼 테니까. 실제로 미용실 집 아들의 울음이 들리는 곳에는 어김없이 지물포 아줌마가, 비디오 가게 아줌마가, 영진이 누나네 아줌마가, 주연이 누나네 아줌마가 나타나 형들에게 소리치셨다.

“누가 동생을 괴롭히니? 성우 때린 놈 누구야!” 그때마다 형들은 얼마나 억울했을까. 내가 얼마나 미웠을까. 글로 적다 보니 그 형들에게 미안해진다. 그러게 때리지는 말지.(메롱)    

 

  바쁜 엄마는, 충만한 사랑으로 아들을 대해주는 동네 아줌마들에게 더 마음을 썼고 그럴수록 아줌마들은 우리 식구들의 더 좋은 이웃이 되어주었다. 그 때문에 엄마의 미용실은 동네 사랑방의 역할을 충실히 해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낮이면 아줌마들끼리 기쁨과 웃음을 주고받는 찻집이 되었다. 문이 닫힌 시간, 말하자면 아저씨들이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마친 시간이 되면 어른들의 설움을 씻어내는 술집이 되었다.


 저녁상을 물린 아빠가 9시에 미용실 문을 닫고 커튼을 침과 동시에, 닭발이며 닭똥집 볶음이며 두 손 가득 안줏거리를 든 아줌마들이 속속 도착하셨다. 그다음으로 빨간 뚜껑의 소주병을 검은 봉투 가득 든 아저씨들이 미용실 문을 여셨다. 물론 그때 아저씨들의 손에는 늘 아이스크림이며 과자며 나를 위한 작은 선물도 들려있었다. (아저씨들이 사 오시는 아이스크림은 늘 메로나 혹은 비비빅이었고, 과자는 뻥튀기 아니면 ‘뻥이요’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건 순전히 ‘아저씨’들의 취향이었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나의 인사를 시작으로 그날도 동네 술판이 벌어진다. 가게 앞을 지나가던 세탁소집 아저씨도, 내 친구 경민이의 아빠인 중국집 배달부 아저씨도 우리 아빠의 손에 이끌려 그야말로 박애주의적인 이 술판의 일원이 된다.


 “성우 안자네? 안녕”

미용실 한쪽 단칸방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나에게 건네는 아저씨들의 안부는 술판에 갑작스럽게 끼어들어 살짝 멋쩍은 그들에게 충분한 입장료가 되어준다. 그 작고 소박한 술판에서 우리 동네 어른들은 함께 안주를 씹고, 안줏거리가 되는 누군가를 씹으며, 오늘의 설움을 씻고 내일의 설움에 대비했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그 술판은 어른들의 삶을 살판으로 만드는 순간이었다는 걸.     


 참 슬픈 일이지만 그 살판나는 술판은 이제 없다. 가난했던 나의 동네가, 아니 더 자세히 말하자면 다 같이 가난해서 가난한지도 모른 채 살던 나의 동네가 재개발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만 그 술판의 틈바구니에서 자란 나는 언제나 북아현동에 가득했던, 인정과 온정의 사람 냄새를 그리워한다. 젊은 내가 와인보다 소주를 좋아하는 이유. 분위기 좋은 바나 펍보다는 허름한 노포를 좋아하는 이유. 이 모든 것들이 다 내가 그 술판을 사랑했기 때문일 테다.  

   

 동네가 사라지니 ‘북아현동 아줌마들’과 마주하는 일이 참 어렵다. 매일같이 살 부대끼며 살던 우리는 살아가다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있을 때만 종종 보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깊은 사이는 없을 것도 같다. 기쁜 일이 생기면 같이 기뻐해 주고, 슬픈 일을 겪을 때는 어김없이 위로를 건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니까.

나를 예뻐하시던 지물포 아저씨와 비디오 가게 아저씨는 돌아가셨다. 영진이누나와 주연이누나는 각기 사랑하는 사람을 얻어 결혼을 했다. 이렇게 북아현동 골목대장을 지켜주던 ‘아줌마들’이 저마다의 슬픔과 기쁨을 통과했다. 흩어져 살지만 여전히 마음으로 이어진 우리는, 그 슬픔과 기쁨들을 함께했다.


 가끔 그 함께함이 깨어질 날을 떠올리며 마음 한 편이 불안해지다가도 이내 그 불안함을 씻어낸다. 불안함이 짙어지는 날엔 어김없이 엄마가 아줌마들과 만나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빠가 지난 주말에 주연이누나네 아줌마 아저씨와 술을 드시고 온 것을 보면, 앞으로도 늘 함께할 것도 같다. 나는 아장아장 걷던 그 시절은 물론 수염이 덥수룩한 지금까지도, 그 함께함 속에서 조금씩 더 어른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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