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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우 Mar 27. 2022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2

자작글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을 각색

 이번에는 내가 녀석의 고민을 들어줄 차례였다.

대학에서 얻은 후배 H는 그 당시 홍역과도 같은 사랑을 앓고 있었다.

녀석의 눈은 너무나도 동그란 탓에 타인의 치명적인 단점조차 쉽사리 찾아내지 못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니 좋은 사람을 만나야만 좋은 사랑을 할 수 있을 터인데, 녀석의 곁에는 언제나 좋음 보다는 나쁨에 가까운 사람들이 다가왔다. 그들의 나쁨을 볼 수 없던 녀석은 언제나 그들에게 가장 쉬운 표적이 되었다. 사랑이 가져오는 아픔에 있어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할 수 있다면, 녀석은 언제나 피해자의 자리에 섰다. 녀석의 연인들은 하나같이 녀석을 속였고, 녀석 몰래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했으며, 종종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일들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매번 같은 사랑의 결말에 끙끙 앓던 녀석은 한숨을 내쉬며 내게 물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어떻게 알아봐요?”

나는 녀석의 물음에 쉽사리 어떠한 대답도 꺼낼 수가 없었다.

언제나 사람 안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나인데도, 이제는 대충이나마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할 수 있다고 느끼는 나인데도, 사랑이라는 전제가 깔린 그 질문에 마땅한 대답을 찾기는 무척이나 어려웠다.

당시는 나 역시 사랑의 쓰라림을 입 속에 머금고 있던 시간이었으므로,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할지 모르겠던 나는 “기다리다 보면 좋은 사람이 오겠지” 따위의 확신 없는 말들로 녀석을 달랬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충치처럼 입 속에서 내내 나를 괴롭히던 사랑의 아픔이 점차 옅어질 무렵 나는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녀석의 질문을 다시금 꺼내 들었다.

비록 주제가 인간사 중 가장 어렵다는 ‘사랑’이 되었을지라도 대답의 기본은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는 일이겠지. 나는 좋은 사람을 어떻게 구분하는지에 대해 답하기 전에, 녀석이 이야기한 ‘좋은 사람’이 어떤 사람을 뜻하는지 짐작해 보아야 했다. 어쩌면 녀석의 ‘좋은 사람’은 ‘좋아해도 좋을 사람’ ‘사랑해도 괜찮을 사람’을 뜻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실망스러운 모습에 자꾸만 상처받던 녀석은, ‘앞으로 누군가를 섣불리 좋아하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 속에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요지는 파악했고 이제는 답을 해줄 차례.

‘사랑해도 괜찮을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내 나름대로 풀어낸 녀석의 질문 앞에서 나는 기억 한편에 덮어두었던 옛사랑의 기록을 펼쳐 들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일이다.

그토록 벅차오르는 가슴 탓에, 그 사람을 봤을 때 나의 이성은 맥을 추지 못했다. 저 사람을 놓치면 우주가 무너질 것만 같은 급박한 심정을 붙들고 ‘저 사람은 내가 사랑해도 괜찮을 사람일까’ 되뇔 수 있을 정도로 느긋한 사람은 물론 드물 테지만, 당시 나는 그 과정을 너무나도 쉽게 건너뛰었다.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그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에서도 의미를 찾으려 했고, 그 사람의 무례는 타고난 당당함으로, 그 사람의 소유욕은 나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의 증표로 포장했다. 핑크빛 잔뜩 물든 눈동자로 바라보니 훗날 나를 아프게 할지도 모를 그 사람의 단점들조차 화사하고 아름답게 보일 수밖에.

이토록 섣부르던 내 사랑은 물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예상대로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정해진 결말로 향했다.


 돌이켜 보면 그 사랑은 참 많이도 아팠다.

헤어짐에 있어서 사랑의 실패에서 오는 아픔보다 사람에 대한 실망에서 오는 아픔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픔이 그렇듯, 그토록 지독한 사랑앓이는 내게 커다란 교훈을 건네주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면 안 될 사람’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이를 내가 가진 짧은 어휘들을 빌려 표현하자면 ‘미성숙한 방어기제를 가진 사람’ 정도가 되겠다. 힘들거나 불안한 상황에 미성숙하게 대응하는 사람과 연인이 되면, 분명 크게 후회할 날이 올 거라는 일종의 확신이 내게 생겼다.     


 세상에는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긍정과 다정으로 일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소한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온갖 부정적 행동 양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그 사람의 본모습과 깊이를 판가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몸과 마음이 지칠 때조차도 긍정과 다정으로 일관하는 사람은 사랑에 있어서도 ‘좋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그 사람은 자신의 태도와 감정을 성숙하게 관리할 줄 아는 사람이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곁에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오염시키거나, 그 감정을 바탕으로 상처 주지 않을 사람이다.


 반대로 아주 사소한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 상황을 애써 외면하려 들거나, 특유의 공격성으로 그 상황을 무마하려는 사람은 사랑에 있어서도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다. 사랑하며 왜 힘든 일이 없겠는가. 갈등과 반목이 언제든지 우리 앞을 가로막는 것이 삶인 것을. 때론 두 사람 사이에서, 또는 이따금 외적인 상황에서 크고 작은 스트레스 상황에 직면할 그 사람은 그때마다 자기 옆을 지켜주는 소중한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고 쉽게 화를 낼 것이다. 그때마다 그 사람의 연인은 한없이 외롭고 쓸쓸할 것이다. 아프고 화가 날 것이다.


 그러니까 돌고 돌아 결국, 한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알아보려면, 그이가 자기 앞의 어려움을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 잘 살펴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당시 후배에게 전하지 못했던 대답을 이제야 스스로에게 건네 본다. 그리고 그 대답은 나 자신을 향한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나는 내가 정의한 대로 좋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을까.     

스스로가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질 때까지 다시 몇 번의 어려움을 겪어봐야겠다. 그 어려움 속에서 긍정과 다정으로 일관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잘 돌봐야겠다.

스스로가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드는 날에, 다시 후배를 불러 이야기해야겠다. 나는 이제 네게 떳떳한 대답을 건넬 수 있다고. 물론 그전에 녀석이 이 글을 읽어 볼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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