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피해의식'을 '피해인식'으로 고쳐 부를 때
다시 또 봄을 스쳐 지난다. 선선한 4월을 지나 따사로운 5월을 건넜다.
올해도 어김없이 4월 3일을 통과해, 4월 16일에 잠시 머물렀다가, 5월 18일을 지나왔다.
어김없이 봄은 맑았고, 남겨진 이들의 눈에는 여전히 아픔이 서려있었다.
근래 들어 자꾸만 곱씹는 말이 있다. 책을 읽다가도, 술자리에 들러 잔을 채우다가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남겨진 이들의 피해의식과 피해인식'.
겪어본 적도 없는 일들을 감히 떠올리며, 홀로 격정적인 감상에 젖는 적이 많았다.
아무래도 책 한 권을 잘못 읽은 탓이다.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의 틈이 너무나 아려서,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연결조차 처절해서 쉽사리 연달아 읽지 못한 책. 그리하여 다 읽는데 자그마치 2달의 시간이 걸린 책. 바로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은 뒤로 그 생각은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한강 작가, 그녀가 온몸으로 길어 올린 4월 3일에 관한 글은 내게 너무나도 아려서, 내 안으로 들어온 이후 몇 권의 책을 읽더라도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그린 세계 속에서, 국가폭력에 죽어간 푸른 섬의 넋들을 기리고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죄의식과 슬픔 속에 살아가는, 남은 자들의 처연한 삶을 가감 없이 그리고 있었다. 광기 어린 시선들에 '빨갱이'로 몰려 죽어간 죄 없는 사람들과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여전히 스스로를 죽여가고 있는 사람들. 한강은 그들 삶에 서린 핏빛 그림자를 덤덤한 문장으로 다정히 훑어냈다.
그녀가 이 책에 다룬 4.3부터, 마찬가지로 국가 폭력에 개인의 삶이 훼손된 5.18, 그리고 불의의 사고가 생때같은 목숨들을 앗아간 4월 16일의 세월호까지. 이 나라의 처절한 불행은 역사의 쳇바퀴 속에서 반복되고 있다. 그 반복 속에서 슬픔을 등에 진 채로 살아가는, '남겨진' 이들이 점점 더 쌓여가고 있다. 그렇게 '유가족'의 이름으로 묶여 불리는 이들은 안타깝게도 여전한 슬픔 속에 서있다. 잃어버린 사랑과 쓰러져 간 사람들을 마음속에서 차마 떠나보내지 못한 채, 그렇게 '작별하지 못한 채'로 힘겹게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진실을 요구한다. 불행이 어째서 떠나간 이들을 삼켰는지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요구한다. 그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그리하여 일말의 억울함 조차 남지 않을 때까지 국가와 사회에 명확한 해명을 갈구한다. "이제 그만해라"라는 식의 무지한 모멸을 묵묵히 견디며, 불행과 비로소 작별할 순간을 기다린다.
해마다 '피해의식'이라는 날카로운 말들로, 유가족들의 절규에 찬 목소리를 나무라는 모습이 보인다.
4월의 제주와 팽목항에서, 5월의 광주에서 떠나간 자들의 넋을 기리는 유가족의 뒤통수에 몰지각한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유가족의 슬픔을 욕심으로 치환한다. 진실에 대한 갈망을 집단적 이기심으로 포장한다. 희생자들과 끝내 '작별하지 못하고 있는' 유가족들을 바라보며, 이제 그만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라 내뱉는다. 그릇된 이성이 이끈 인간적 감수성의 마비가 아닐 수 없다.
그들에게 타인의 불행은 어떤 의미일까? 아니 그것보다, 그들에게 불행이란 어떤 의미일까?
환경(상황) 속의 우리.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환경(상황) 속에서 휘청이는 우리는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 가져오는 기쁨과 슬픔의 틈바구니를 살아간다. 때론 도무지 피해 갈 수 없는 환경(상황) 탓에 사랑을, 사람을, 그리하여 결국 삶을 잃어갈 날도 있을 것이다.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명백히 자행된 대규모의 양민학살, 인간의 과실과 하늘의 무심함이 합쳐져 벌어진 뜻밖의 대규모 선박사고. 이처럼 나의 힘으로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불행들이 자신의 일이 되었을 때도 그들이 그토록 비판하는 '피해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지, 그들에게 묻고 싶다.
적어도 우리가 일말의 감수성을 가진 한 명의 인간이라면, 타인의 불행 앞에 '피해의식'이라는 말을 갖다 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유가족들의 아픔에 공감하지는 못할지라도, 합리를 빙자한 모진 말들로 그들의 불행에 생채기를 더해서는 안된다. 그건 인간이라는 가면 뒤에 흉폭한 얼굴을 숨긴 괴물이나 할 짓이다.
우리는 유가족들에게 닥친 불행이 전혀 합리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남겨진 자들의 절규에 찬 '피해의식'을 '피해인식'으로 고쳐 부를 때. 그리하여 그들의 슬픔에 찬 표정을 바라보며 이 사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때, 우리 사회는 비로소 인간이 사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