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아나두라 대논쟁>을 읽고 나서
논쟁이라는 것
논쟁이란 둘 이상의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글이나 말로 각자의 생각이나 주장을 논하여 다투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 사는 우리에게 ‘논쟁’이라는 단어는 왠지 피해야 할 것 같은 폭력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이는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 간의 논쟁이 피를 부르고 비극을 불러온 지난 한 한국 근현대사의 과정에서, 한국인이 자연스럽게 체현한 보신주의의 발현일 것이다. 멀리는 6.25 전쟁과 분단, 4.3 사태와 5.18 민주화운동, 가까 이는 여전히 건재한 한국 정치권의 레드 콤플렉스 낙인이 그러하듯 자신 과는 다른 주장과 이데올로기에 이질감을 느껴 상대를 비난하고 탄압하려는 시도들 속에서 대부분의 한국인은 논쟁보다는 함구를, 논쟁보다는 체념을 선택하여 왔다. 따라서 정과 반이 합으로, 대립하는 두 의견이 건설적 진보로 이어진다는 헤겔의 간단한 논증과도 같은 긍정적인 현상은 한국에서 그리 많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혹자는 여태까지 이어져 온 한국의 비논쟁적 사회 분위기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라고 필자가 이렇게 날 선 비판을 하는 것일까? 하며 의아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건설적인 논쟁은 분명히 우리 사회의 진일보를 가져올 것이라고, 또 논쟁이 가져오는 사회적 진일보의 혜택을 누리 지 못하는 한국 사회는 변화하여야 한다고 필자는 분명히 믿는다. 이러한 필자의 주장은 1873년 8월 스리랑카 파아나두라 지역에서 벌어진 불교와 기독교 간의 대론, 일명 ‘대논쟁’과 그것이 가져온 스리랑카 사회의 진일보를 통해 증명될 것이다.
치열했던 논쟁의 과정
1873년 8월 26일과 28일 양일에 거쳐 진행된 이 논쟁은 스리랑카의 작 은 마을 ‘파아나두라’를 배경으로 한다. 논쟁은 같은 해 6월 그 지역 영국 감리교회의 데이비드 드 실바 목사가 자신의 설교 중 불교의 교리를 폄하 한 발언을 한 것을 서막으로 한다. 이러한 폄하 발언을 스리랑카 불교계 구나난다 스님이 맹렬히 비판하였고 이로 인해 대논쟁의 장이 마련되었다. 논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 두 달간 불교계와 기독교계는 논쟁의 구체적인 일시와 규칙을 합의하에 마련하였고 마침내 8월 26일 1만여 명의 군중 앞에서 서로의 교리가 갖는 허구성을 증명하기 위한 ‘대논쟁’이 시작되었다.
논쟁에서 영국 감리교의 데이비드 드 실바 목사와 시리만나 전도사가 기독교계를 대표하였으며, 스리랑카 불교의 구나난다 스님이 불교계를 대표하였다. 논쟁은 총 4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첫 번째 논쟁은 기독 교계의 선공으로 시작되었다. 이 첫 논쟁에서 기독교계는 불교의 주된 가르침인 윤회와 무아의 비합리성을 지적하며 불교를 ‘사이비 종교’라 힐난하였으며, 오온(색, 수, 상, 행, 식)을 부정하면서 영혼불멸을 믿는 기독교의 우수성을 주장하였다. 반론에 나선 구나난다 스님은 이러한 기독교계의 주장은 불교의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편견이라고 일축하였다. 또한 중생 구제보다는 자신들의 종교로 개종시키는 것을 제1 가치로 여기 고 행하고 있는 기독교가 가진 배타적 유일신 사상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불교계의 이러한 논박에 당황한 기독교계는 이어지는 논쟁에서 연기설 이 갖는 비정합성, 불교의 교리적 허구, 경전에 대한 신뢰성, 삼보의 귀의 문제 등을 거론하며 불교를 ‘무의미한 종교’로 규정하였고 ‘온전한 존재’인 하나님께 귀의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기독교계의 주장을 구나난다 스님은 ‘불교에 무지하여 생긴 오해’라 규정하면서 연기설, 경전의 성립과정, 불교의 세계관과 철학에 대하여 조목조목 설명하였다. 이를 통하여 기독교의 배타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선악에 대한 불교의 합리적 판단, 교리의 체계성을 입증하였다.
1만 여 명이 넘는 군중 중 불교 신도들은 물론, 기독교 신자들 중 대다수 가 불교계의 승리를 인정하였고, 이는 스리랑카 전통 종교인 불교가 식민 지배 수단의 일환으로 대변되던 기독교를 대항하여 거둔 첫 번째 승리였다.
논쟁이 가져온 사회적 진일보
위에서 설명한 파아나두라 대논쟁을 비단 양립하는 두 종교 간의 분쟁의 역사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이 논쟁은 스리랑카 불교의 발전은 물론, 영국의 식민지배 아래 잃어가던 스리랑카의 민족적 정체성과 자긍심을 되살려 민족 해방운동의 도화선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스리랑카는 B.C 3세기 중반 불교가 전해진 이래로, 불교가 국교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던 자타공인 불교 문화권이었다. 국가의 공식적인 장려를 바탕으로 불교는 스리랑카인들의 생활과 문화 전반에 걸쳐 대단한 영향력을 미쳤다. 즉 불교는 곧 스리랑카인의 민족적 정체성 그 자체였던 것이다.
따라서 18세기 영국의 식민지배가 시작될 때 영국 정부가 스리랑카의 통치를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스리랑카인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이러한 민족 정체성을 개조하는 것이었다. 마치 일제강점기 일본이 조선에 행하였던 민족말살정책과 문화통치와도 같은 방식이 스리랑카인에게는 불교를 탄압하는 방식으로 행해졌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스리랑카 왕실과 체결한 ‘불교 불가침 보호’를 어기고 불교의 종단 지도자 선정을 방해하였으며, 기독교 세례를 받은 스리랑카인에게만 출생신고와 혼인신고,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등 기독교계는 비인간적이고 비합리적이 방법들을 바탕으로 불교를, 스리랑카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훼손하였다.
이렇듯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서 파아나두라 대논쟁을 통해 구나난다 스님은 기독교의 배타성과 편협성을 논리적으로 비판하여 불교의 상대적 우월성을 입증한 것이다. 이 논쟁을 지켜본 스리랑카 청년 다르마 파아라 는 마음이 발해 불교에 입적한 후 스리랑카 불교 부흥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또한 이 논쟁을 글로 접한 미 육군 대령 올코트가 이 논쟁에 크게 감동하여 서양인 최초로 계를 받아 불교도가 되었으며, 스리랑카는 물론 전 세계에 불교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세계신지학협회를 설립하고 불교기를 제정하였다. 따라서 이 논쟁은 꺼져가던 스리랑카 불교의 정신을 재정립하고, 세계 불교 부흥 운동을 시작하게 하는 촉매제의 역할을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논쟁은 탄압받던 당대 스리랑카인들에게 큰 자긍심을 심어 주었고,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식민지배의 부당성과 비합리성을 스 리랑카인들의 인식에 깊게 새긴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는 이후 불교를 중심으로 하는 스리랑카의 민족 해방 운동에도 기폭제로서 작용하였으며, 1948년 영국으로부터의 해방 이후 현재까지도 불교가 스리랑카인의 제1 종교(2001년 기준 인구의 약 70%가 불교를 종교로 함, 기독교는 인구의 7.5%불과)로서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논쟁적 분위기
위에서 필자는 논쟁이 가져오는 건설적 사회변화들이 분명히 존재함을 주장하면서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1873년 스리랑카에서 진행된 파아나두라 대논쟁이 스리랑카에 가져온 사회적 의의를 그 근거로 들었다. 필자는 100년도 더 이전에 벌어진 이 논쟁을 바라보면서, 지난한 역사의 과정 속에서 얻은 논쟁 회피적 보신주의가 한국사회에 가져온 비논쟁적인 사회 분위기가, 결국은 우리 사회의 진일보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우리 사회에도 합리적 논쟁을 장려하고 논쟁에 대한 참여를 독려하는 이른바 ‘논쟁적인 사회 분위기’가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필자는 한국 사회에서 ‘논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를 역사적 총체성에서 얻은 한국인의 보신주의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보신주의를 타파하는 것을 한국 사회에 올바른 논쟁 문화 정착의 근본적 해결책으로 삼고 이를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를 위하여 ‘자유로운 공론장’과 ‘논쟁을 위한 사회적 안정망의 구축’이라는 필자 나름의 두 가지 해결책을 제시하려 한다. 우선 ‘자유로운 공론장’이란 독일의 담론 윤리 주창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을 차용한 것으로, 이것이 구성되고 구현되는 방식은 그의 방법론을 따른 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그의 책 <민주주의와 공론장>에서 ‘공론장’의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 공론장을 구성하는 주체는 공중이며 그 공간에 들어온 이상 모든 이들은 지위의 높고 낮음과 무관하게 모두 인간 일반의 동등함으로 만난다. 이곳 공론장에서 공중은 스스로 평등한 공중의 일부로 위치해 개방적인 토론의 주체로 참여할 권리와 능력을 갖는다.
이러한 공론장을 우리 사회에 구현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담론 장소 마련이 제1 과제일 것이다. 이는 국가나 지방정부의 지원과, 지역사회와 시민사회 차원에서의 후원 등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다음, 담론 참여 주 체들의 인식에 한국인이 흔히 보이는 보신주의적 함구의 태도를 개선하고, 상대의 발언을 존중하고 경청하는 태도를 길러주기 위한 체계적인 교육의 마련이 필요할 것이다. 이는 초, 중, 고등학교의 의무교육 과정과 나아가서는 지역사회, 시민사회 차원에서의 교육 과정의 제공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단지 이와 같은 ‘자유로운 공론장’이 있다고 해서 시민 누구나 이 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즉, 필자가 원하는 논쟁적인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앞서서 밝혔듯이 대부분의 한국인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말’을 하면 낙인이 찍히고 탄압당하던 지난한 역사를 직접 또는 간 접적으로 경험하여 왔고, 이에 대한 ‘역사적 트라우마’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함부로 밝히지 않는 것을 생활의 방침으로, 또 생활의 지혜로 여기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역사적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해주는 것이 ‘논쟁’과 ‘담론’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바꾸어 논쟁적 사회로 가는 첫 발걸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논쟁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시민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도 자신의 신변에 위협이 되지 않음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이를 구축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사회 입법을 통한 발언권의 보장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물리적, 정신적으로 타인의 발언권을 직접적인 또는 간접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제한하거나, 발언 이후의 폭력적, 차별적 행위를 한 당사자에게 적극적 보상을 하게 하는 구체적인 법률이 제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가올 논쟁적 사회
필자는 이 글에서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한국의 비논쟁적 사회 분위기를 우리 사회의 진일보를 가로막는 걸림돌이라 규정하였고, 이의 해결을 위한 논쟁적 사회 분위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 과정에서 논쟁적 사회 분위기가 우리 사회에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 변화들을 <파아나두라 대논쟁>을 통하여 방증하였고, 위르겐 하버마스의 담론 윤리를 인용하며 논쟁적 사회 분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필자의 주장대로 논쟁적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고, 종국에는 논쟁적 사회가 도래한다면 우리 사회는 진일보할 수 있을까? 혹자는 필자의 이러한 주장을 순진한 청사진이라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에 대 하여 이른바 ‘논쟁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를 예로 들며 반박하고자 한다.
2018년 11월 마크롱 정부의 유류세 인상 정책과 그로 인한 생활 고를 이유로 시민들은 거리에 나와 대정부 항의 시위를 벌였다. ‘노란 조끼’를 입고 군집한 만여 명의 시민들은 항의 차원에서 폭력적인 양상을 보였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시민과 경찰이 다치거나 희생되었다. 마크롱 정부는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를 돌며 ‘사회적 대토론’이라는 논쟁을 벌였고 소상공인, 제빵 기술자 등의 서민들부터 정부 각료 등 사회 지도층까지 이 논쟁에 평등하게 참여하였다. 이후 논쟁에서 나온 합의점과 대안점을 마크롱 정부는 사회 입법에 구체적으로 반영하였고 결국 마크롱 정부는 반서민적 계획과 정책을 철폐하였다. 프랑스의 논쟁적 분위기와 이것이 가져온 사회적 대논쟁이 프랑스에 건설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이러한 프랑스의 일화는 필자의 주장에 대한 반박을 갈음할 수 있는 구체적인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논쟁이 가져온 사회적 변화와 진일보를 비단 프랑스와 같은 ‘논쟁 선진국’만이 가져서는 안 된다. 이제 한국 사회도 논쟁적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고, 논쟁적 사회로의 변모를 추구하여야 한다. 논쟁은 마침내 건설적 진보를 가져오기에.
참고 자료
석오진, <파아나두라 대논쟁>, 서울 : 운주사, 2001.
위르겐 하버마스, <민주주의와 공론장>, 서울 : 컬처 룩,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