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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우 Oct 07. 2023

가을과 무라카미 하루키

 하늘은 색종이를 펼쳐놓은 듯 티 없이 파랗고, 나무 가득 주렁주렁 열린 감은 서늘해진 바람에 주황으로 몸을 붉힌다. 여지없는 가을이다.

한여름 더위에 느슨해지고 둔해졌던 감각이 곤두서기 시작하는 이 계절엔 커피와 책이 빠질 수 없다. 민감해진 코로 매큼 쌉쌀한 커피 향을 맡는다. 예민해진 마음으로 한 글자 한 글자 활자를 훑는다. 몸에 두른 긴팔이 아직은 어색해 손끝으로 소매를 매만진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옷소매와 종이가 부딪히는 샤라락 소리에 귀가 노곤해진다.      


 가을이라 하루키를 펼쳤다. 그의 글에 대한 나의 예찬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며 이에 걸맞은 장황한 이야기를 품고 있지만, 이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몸의 쌀쌀함과 마음의 쓸쓸함 모두를 달래기에 손색이 없는 멋진 글이라는 것. 돌아온 추수의 계절 한가운데 하루키의 글은 절묘하다. 올해의 노력의 결실이 풍년일지 흉년일지 얼마간의 판단이 서는 이 시점, 유난히 불만족스러운 한 해의 말미에는 그래서인지 책장 속 하루키가 자꾸만 아른거린다.     


 청춘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그래서 무언가 자주 억울하고 틈틈이 불안하다. 어쩌면 그래서 청춘을 ‘상실의 시대’로 규정한 그가 꾸준히 젊은 독자들과 공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의 글은 오랜 세월, 불안에 빠져있는 여러 청춘을 다독이고 구제했다. 젊은 독자들은 그의 글을 읽으며 비현실적 상상 속에 불쾌한 현실을 의탁하기도 했고, 그의 문장이 담고 있는 깊은 철학에 자신의 삶을 투영하고 삶의 자세를 바로잡기도 했다. 그렇게 젊음과 꾸준히 공명하기 위해 밤낮으로 달리고 매일매일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써온 영원한 청춘 작가는 어느새 일흔의 노인이 되어 인생의 황혼을 맞이하고 있다.     


 일흔넷의 그가 새로이 가져온 책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더없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이 글은 그가 글을 쓰기 시작한 초창기에 처음 쓰이기 시작해 다수의 수정을 거쳐 43년 만에 발표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의 역작 <상실의 시대>와 집필상의 시간적 괴리가 거의 없는 글이라는 점에서 나를 비롯한 그의 팬들에겐 선물 같은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작품 세계를 끊임없이 확장해 온 거장의 다소 미숙하고 순수했던 초창기 시절 발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은, 우리가 사랑했던 그의 글 속 미숙한 청춘의 시절을 다시금 환기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을 부여한다. 어쩌면 그 시절 우릴 울린 ‘나오코’와 ‘미도리’를, 상실의 시절을 함께 견뎌준 ‘와타나베’를 다시 만날 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라는 감상적인 구절로 시작하는 이 책은 상실의 시대의 마지막 문장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와 비슷한 감흥을 준다.     

 

 이 가을, 유난히 하루키가 어른거리는 이유는 단지 이 책이 출간되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청춘의 모호한 지점에 설 때마다 나는 하루키를 찾았다. 길어졌던 수험생활에, 첫사랑을 떠나보낸 그 아픔의 시기에, 소란스러웠던 새내기 시절과 안팎으로 혼란했던 군대시절에. 그리고 지금, 대학 졸업을 앞두고 경제적 독립을 준비하는 청춘의 가을(수확기)에 다시 그의 책을 손에 쥔다. 그가 불완전한 청춘의 이야기로 다시금 나를 위로할지, 아니면 끊임없이 넓혀온 상상의 세계로 나를 이끌어 현실의 불안을 잊게 할지 아직은 모른다. 그저 흔들리는 청춘의 가을, 767페이지의 다독임이 내게 있어 다행일뿐이다. 전자이길 조용히 바라며 글을 마치고 책장을 펼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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