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글을 씁니다
'엄마 구름이 울어요'
봄비가 내리던 어느 날, 하늘을 올려다보던 5살의 제가 엄마에게 건넨 말입니다.
모든 것이 처음인 순간들에 진력으로 호들갑을 떨어대는 아들을 보며, '쟤는 커서 글쟁이가 되려나' 엄마는 생각했더랬죠. 엄마의 생각이 예언이 되었는지, 어쭙잖은 글이나마 꾸준히 써 책을 냈고 그것도 모자라 전업으로 글을 쓰는 카피라이터 일을 했습니다.
짧은 기간 전업 글쟁이(카피라이터)로 살며 유난히도 행복했습니다. 물론 매일밤을 지새우며 체력의 한계와 마주하는 시간들은 억울하고 분했지만, 그럼에도 저는 유난히 그 직업을 좋아했습니다. 이유는 명확했어요. 카피라이터에게는 글쟁이가 가질 수 있는 특권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것은 바로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었죠.
세상 돌아가는 일과, 마주하는 모든 장면에 최대한의 감수성을 발휘하는 것. 무엇이든 궁금해하고 진심으로 느끼는 것. 제 안에 꾸준히 인풋을 넣고 글이라는 아웃풋으로 치환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덕목을, 제 직업의 특권으로 생각하며 매일을 누렸습니다.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며 울고 웃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떠들고, 발에 땀이 나도록 돌아다니며 세상을 눈에 담고. 마치 허기진 사람이 그렇듯 인풋을 찾아 천방지방 쏘다녔죠. 가끔 너무 과하게 나다니나 스스로 머쓱해질 때마다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을 핑계로 활용하면서요.
여타의 이유로 카피라이터라는 직무를 내려놓고 다른 일을 시작할 때,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기분을 느낀 것은 아마도 이 핑계를 잃어버렸다는 생각 탓 같습니다. 오래 간직했던 꿈이나 카피라이터로서 짧게나마 쌓아왔던 경험이 아깝다는 생각보다는, 이제는 더 이상 '실컷 호들갑 떠는 삶을 살 수가 없다'는 생각이 제 마음을 더 아리게 했습니다.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생활적 여유와 심신의 안녕을 찾았지만, 한동안 마음 한구석에 공허함이 쌓여갔습니다. 그러나 그 공허함을 애써 무시하자 명료하고 편안한 삶이 열리더군요. 이제는 영화나 책을 읽고 가슴속에 무언가 들끓는 감정이 올라와도 의무처럼 글로 옮기지 않아도 됐습니다. 또 일상의 아름다운 풍경을 봐도 그저 그 순간을 즐길 뿐, 부유하는 감상을 끌어다 아웃풋으로 연결하는 노력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그렇게 일 년이 넘는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애써 무시했던 마음속 공허함이 쌓여 임계치에 다다르자, 점차 삶이 무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감정은 메말라가고 일상은 쳇바퀴처럼 느껴져 가더군요. 종국에는 일상의 무기력함과 마주하기도 했고요. 그러던 중 제가 놓치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이 문득 떠오르더군요.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은 태도이지 직업적 특권이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 말이에요. 마주하는 일들에 난생처음 보는 아이처럼 호들갑을 떨며 온몸으로 느끼는 삶, 그리하여 나의 감수성을 풍요롭게 가꾸며 사는 삶은 제 직업이 무엇이든 이어나갈 수 있는, 그야말로 선택 가능한 삶의 태도라는 자명한 사실을 깨닫는데 1년여의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다시 찾은 삶의 태도는 잃었던 시간만큼이나 더 짙어졌습니다. 이제는 길거리에 핀 들꽃을 보기 위해 길을 돌아가고, 가을의 소리를 온몸으로 느끼기 위해 부러 낙엽이 쌓인 길로 걸어갑니다. 마주하는 사람의 설움에 함께 눈물짓고, 지나가는 사람의 기쁨에 함께 웃습니다. 글쟁이였던 시절처럼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 의식하며, 다양한 빛깔의 감수성으로 제 삶을 칠해나갈 궁리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