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성우 Dec 10. 2020

인연

피천득 선생께

 햇살은 따스했으나, 아주 가는 여우비가 내리던 봄날이었습니다. 인사동 작은 찻집에서, 짙은 향수를 뿌린 아름다운 여인과 마주 앉아 국화차를 시켜놓고는 홀짝이며 나누어 마신 기억이 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그 여인의 짙은 향수 냄새나 생김생김, 유독 즐거웠던 그날의 대화는 잘 기억이 나지 않으나 국화차의 은은한 향기만은 잊히지 않습니다. 선생의 글은 그날의 국화차와 같습니다. 선생의 글은 그리 자극적이지도 그리 강렬하지도 않으나, 읽는 이의 마음 한편에 은은한 잔향을 오래도록 남깁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어딘가 흥미가 끌리는 구석이 있는 글을 읽을 때면 열 일을 제쳐두고서라도 얼른 읽어내곤 하는 저인데, 선생의 글은 천천히 오래도록 아껴 읽고만 싶었습니다. 마치 벽장 속에 숨겨둔 달콤한 꿀을 남몰래 조금씩, 야금야금 먹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주 천천히 오래도록 읽는 동안에, 가슴 한구석 떠오르는 슬픔에 마냥 울기도, 일상의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떠올리며 지긋이 웃어보기도 했습니다. 떠나간 이를 잠시 떠올리다가 이내 가슴에 묻으며 그이의 행복을 빌어주기도, 인연이 닿아 곁에 있어주는 이들을 더 부드러운 눈짓으로 바라보기도, 밤잠 설치는 날엔 선생께서 자주 가시던 5월의 비원을 떠올리며 어스름한 서울의 밤길을 거닐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곤 문득 수필이 쓰고 싶어졌습니다.

선생의 글을 닮은, 다른 이의 가슴에 은은하게 남아 그들의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글이 쓰고 싶어졌습니다.

 

덕분에 이 겨울 한 철을 넉넉히 보냈습니다. 그리곤 이내, 보다 산뜻하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새봄을 맞이합니다.

제게 주어진 생을 살아내는 과정에서 조금 지칠 때, 마음이 슬픔에 착 가라앉거나 기쁨에 붕 뜰 때면 다시 선생의 글로 돌아오겠습니다. 지난겨울과 마찬가지로 아주 오래도록 선생의 글이 제 마음 한구석에 남기는 잔향을 음미하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위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