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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우 Dec 10. 2020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위하여

 살아가는 나날 속에서 생활의 여울 물에 휩쓸릴 때, 그러니까 겨를 없는 삶 속에서 수많은 과업과 관계들에 이리저리 치이며 몸과 마음이 헛헛해질 때, 우리는 일상이 주는 작은 기쁨을 잊곤 한다.
사실 우리 삶은 그리 크지 않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나 역시 대단한 기쁨과 커다란 성취만을 위해 나의 피로를 헌납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많다. 그럴 때면 피천득의 수필에서처럼, 일상을 따라가며 우리의 생활을 이루는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생각한다.

 우선 나는 하루를 시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비추어주는 포근한 아침볕을 사랑한다. 아침볕의 부드러움과 따뜻함은 남들보다 이르게 하루를 시작하는 부지런한 사람들의 특권이다.
나는 집 뒤편 프랑스 대사관 뜰 안에서 지저귀는 이름 모를 새의 노랫소리를 좋아한다. 상쾌한 아침 공기와 어우러진 새소리 덕에 경쾌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나는 부드러운 크레마를 도톰하게 감싸 안은 갓 내린 커피의 쌉쌀함을 좋아한다. 진한 커피의 묵직한 쓴맛은 분주한 하루를 보내라는 다그침이 되기도, 지친 나를 달래는 응원가가 되기도 한다.
나는 한가한 카페의 귀퉁이에 앉아 따뜻한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한 구절 한 구절은 마음을 푼푼히 채워주기도, 남몰래 눈물을 흘리게도, 입가에 지긋한 미소를 짓게도 한다. 읽던 구절에 손을 대고 옆자리 사람들의 소소한 대화를 가만히 엿듣기도, 적막을 채우는 잔잔한 음악에 손끝이나 고개를 까딱 움직여보기도 한다.


 나는 분주한 서울 거리를 거닐 때 든든한 벗이 되어주는 음악들을 사랑한다. 기분에 따라 선곡을 바꾸어보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새에 틀어진 노래가 나의 기분을 바꾸어놓기도 한다. 음악의 그 은근한 힘은 참 매력적이다.

 나는 김광석의 노래가 어울리는 작은 노포에 앉아, 오랜 친구들과 변변치 않은 안주에 독한 소주 한 잔 기울이는 것을 좋아한다. 함께 나눈 지난날의 슬픔과 기쁨에서부터 다가올 날의 희망에 이르기까지, 취기 어린 이야기는 두서없이 사방으로 흐르지만 마주 앉은 얼굴들의 이완된 표정에서 세상 그 어느 이야기보다 더 따뜻한 이야기를 듣는다. 울고 싶을 때는 울고, 웃고 싶을 때는 웃으며 마주 앉은 익숙함과 편안함 속에서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인연을 맺는 것을 좋아한다. 처음 마주 앉은 사람과의 어색한 적막과 그 적막을 깨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서로의 눈짓은, 그 공간을 가득 채울 만큼의 빛을 내는 듯하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해맑은 미소와 맑은 음성을 좋아한다. 더 맛있는 것을 먹이고, 더 많은 것을 주고, 어렵지만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은 그이의 미소와 음성이 주는 잔잔한 행복에서 비롯된다.


 나는 ''아드-을''하며 부르시는 어머니의 낮은 음성을 사랑한다. 이미 많은 것을 주고도 더 주지 못해 아쉬워하는 그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진다.

 나는 아버지의 이마에 움푹 팬 주름과 자연스러운 아치를 그리며 축 처진 양복 어깨를 사랑한다. 가장으로 보낸  외롭고 쓸쓸했을, 무겁고 부담되었을 세월들을 보여주는 훈장인 것만 같다. 슬프고 죄스럽다.

 나는 이 도시 서울을 사랑한다. 도시의 밤을 비추는 찬란한 불빛과, 저 멀리 달빛의 은근한 아름다움을 느끼며 거니는 밤 산책을 좋아한다. 오래된 골목길과 종로를 종로답게 하는 사람 냄새나는 오래된 시장들을, 오늘도 내일도 바쁘게 살아갈 도시 사람들의 분주함을, 대학가 인근 번화가 술집의 소란스러운 젊음을, 종각 젊음의 거리 혹은 북창동 뒤편 먹자골목에서 한 잔 술에 일상의 설움을 씻어내는 회사원들의 자연스러움을 사랑한다.

 나는 예술을 사랑한다. 서점 한구석에 서서 한 구절 한 구절에 웃고 우는 아이들의 귀여운 표정을, 상영이 끝난 영화의 여운에 압도되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극장의 무거운 적막을 사랑한다. 더 나은 글이나 더 나은 음악을, 더 나은 그림이나 더 나은 영화를 세상에 내어놓기 위해, 치열하게 고뇌하는 예술가의 헝클어진 머리를 사랑한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른 후 여유가 된다면, 그들이 서로 편하게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한자리 차지하고 앉아 슬금슬금 그들의 열정을 지켜보고 싶다.

 봄에 태어난 나는, 약동하는 봄날의 생명력을 사랑한다. 여름처럼 강렬하지도, 가을처럼 충만하지도 않지만 조용히 모든 시작을 움 틔우는 겸손한 봄을 닮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들을 묵묵하고 겸손하게 챙길 줄 아는 봄을 닮은 사람이 되고 싶다. 작고 아름다운 것들에 둘러싸인 나의 삶을 감사히 여기며, 작고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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