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성우 Dec 21. 2020

장소를 닮는다는 것, 학림에서

대학로 학림다방에 스민, 모든 이들의 모든 순간

 언제나 젊은 거리 대학로를 거닐다 보면,
대로 길게 늘어선 플라타너스 나무 행렬의 끝자락

그곳엔 아주 오래된 다방 '학림'이 있다.

 비참한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6년에 문을 연 학림은 4.19, 5.18, 6월 항쟁 등 험준한 우리 근대사의 단층을 오랜 세월 묵묵히 버텨왔다. 자리한 세월만큼이나 수많은 이들이 거쳐갔고, 그들 중 더러는 이름 없이 사라졌으며 더러는 세상을 바꾸기도 했다.

 젊은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고 젊은 무명가수 김광석의 취기 어린 노랫말이 흘러나오던 곳, 최루탄 냄새 몸에 밴 학생들이 군홧발을 피해 들어오던 곳, 젊은 지성들이 시대의 비천을 열띠게 토론하던 곳, 때론 헐벗고 때론 빛을 잃었으나 거쳐간 수많은 이들의 추억을 간직한 곳, 쌓여온 세월만큼이나 학림에서의 기억은 켜켜이 쌓여있다.

 나는 마리오네트 공연을 위해 지어졌다는 나무로 된 복층 구석에 앉아,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학림을 느꼈다.
가장 많이들 찾는다는 비엔나커피는 진한 에스프레소 위에 밀도 높은 크림이 올라가 있었고, 크림 위 군데군데에 흩뿌려진 시나몬 가루는 커피의 향긋함을 돋우었다. 한 모금에 담긴 묵직한 달큰함은 다방 안은 물론, 창밖 너머 오고 가는 이들의 지친 하루를 달래는 듯했다.

 먼지 쌓인 선반에는 멈춰 선 영사기가 놓여 있다. 영사기는 마치 다방 안의 풍경을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만드는 듯했다. LP판의 지지직거리는 떨림이 느껴지는 나이 든 음악과 소곤거리는 사람들의 부산스러움은 지금 상영되고 있는 장면이다.


 볕이 잘 드는 창가 쪽 낡은 천 소파에는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께서 소녀 같은 웃음으로 옛 추억을 더듬고 계신다. 입구 쪽 머리를 단정하게 빗은 신사는 손때 묻은 나무 칸막이 위에 턱을 괴고 책을 읽다가 졸다가를 반복한다. 오늘 처음 만난듯한 남녀는 어색한 적막을 한 모금 커피에 애써 지운다.


 영사기 옆 빛을 잃은 동색 지구본에는 세계를 누비겠다던 꿈 많은 젊은이의 열정 어린 대사가 담겨있는 듯하고, 천정에 열 맞추어 주렁주렁 열린 와인잔과 가지런히 도열한 맥주잔은 지나간 계절들 속 기쁨과 슬픔의 장면들에 소품으로 쓰였으리라. 서로가 주인공인 연인들은 술잔을 부딪히는 쟁그랑 소리를 반주 삼아 영원을 약속했을 것이고, 사랑을 잃은 누군가는 그 술잔을 점잖은 벗과 부딪히며 쓰라린 상처와 먹먹한 가슴을 달랬을 것이다.

가슴 떨리는 설렘을 간직한 연인들에게 삐걱대는 다방의 문은 일상의 피로에서 벗어나 그들만이 오롯이 주인공인 무대를 여는 무대막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학림은 오래전부터 머물다 간 모든 이들의 모든 순간을 덤덤히 담고 있었다. 때로는 따뜻한 위로의 장소가 되어주기도, 때로는 멀리 빙 둘러가고만 싶은 아픔과 미움이 서린 장소가 되어주기도 하면서 말이다.

 유년시절, 담임선생님께서 누구를 닮고 싶은지 적어오는 숙제를 내주셨다. 알림장에 내가 그때까지 들어본 위대한 사람의 이름을 모두 적어서 가지고 간 기억이 있다. 만약 그 숙제를 지금까지도 계속 해왔다면 지금쯤 내 알림장에는 그때와는 비교도 못할 정도로 훨씬 많은 이들의 이름이 적혀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이들의 삶을 바라보고 배우면서 더 많은 이들을 닮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그 알림장에 닮고 싶은 장소도 한 곳 적어 넣고만 싶다.
한자리에 묵묵히 앉아 많은 이들의 기쁨과 슬픔, 삶의 굴곡과 부침을 차별 없고 덤덤히 들어주는, 그리고 그들의 스쳐 지나간 날들을 기억해주는, '학림'을 닮은 사람이 되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별의 위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