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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우 Dec 22. 2020

'상실의 시대'가 내게 남긴 것

어른이 된다는 건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한 구절 한고비 꺾어 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지만, 살아가다 보면 유난히도 버텨내기 힘든 시절이 온다.
그리고 그 시절의 대부분은 우리가 삶에서 겪는 어떤 상실때문에 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목숨과도 같았던 소중한 사람을 잃어서, 진력을 다했던 사랑이 떠나가서, 희망했던 어떤 것을 이루지 못해 포기해서 꿈을 잃어서 아니 어쩌면 꿈을 꿀 힘조차도 잃어서,

등과 같은 이유들로 오는 '상실의 시기' 말이다.
그 시절은 살아내기가 참 버겁다.

  그 '상실의 시기'는 조금은 이르게 나에게도 찾아왔다.
스무 살, 어른이 된다는 20대의 초입에서 과할 정도로 많은 '상실'들을 겪었다.
이루고자 하는 무언가를 잃었고, 그 탓에 자존감은 스스로 무너져 내렸으며, 마지막 남은 자존심은 내 안에 아집과 어리석음을 심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아집과 어리석음은 기승을 부렸고 진심을 다해 사랑했던 오래된 연인과, 친구들 중 더러는 나를 떠나갔다. 때마침 집안에까지 좋지 않은 일들이 겹쳐 아주 여러모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내 안팎으로 깊은 어둠이 드리운 나날이었다.

  도무지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답답함과 함께, 첩첩이 솟은 험한 산길을 홀로 걸어가거나 컴컴하고 깊은 수렁 속에 의지할 데 없이 덩그러니 홀로 서있는 듯한 고독한 기분이 들곤 했다. 이내 물속에 머리를 끝까지 담그고 바깥과는 완전히 차단되어 무엇이든 다 잊어버리고만 싶은 감정에 휩싸이기도 했다.
나의 삶에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소중한 것들을 잃자, 내 안에 어떤 빈 공간이 생긴 기분이었다. 그 공백을 채우려고 발버둥 쳤지만 뻘밭에서 그렇듯, 발버둥 치면 칠수록 스스로 더 깊이 아래로 침전했다.

  그때,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상실의 시대'를 처음 접했다. 하루키가 누군지도, 이 책이 어떤 소설 인지도 모른 채, 왠지 나의 상황과 비슷한 제목이라는 생각과 함께 서점 가판대 한구석에 서서 책의 첫 장을 넘겼다. 그리곤 그 두꺼운 책이 끝날 때까지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읽는 내내 청춘의 문턱에서 사랑과 우정을 잃고 방황하는 '와타나베'를 나와 동일시했고, 그가 그의 '상실'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은, 나의 방황을 끝맺을 방법을 알려주었다. '와타나베'는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하여 애써 거부하거나 미련을 갖지 말고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고 나를 타일렀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던 일들, 이를테면 뜻대로 되지 않던 나의 상황들과, 어쨌든 나와 함께하는 것이 힘들어서 나를 떠나간 이들에 대한 미련, 그것들에 대한 집착과 그로 인한 고통은 나의 '받아들임'과 동시에 점차 희미해져 갔다. 그렇게 한고비를 넘긴 후, 나의 앞에 닥친 크고 작은 고비들에 거부보다는 수용을 택했고, 꽤나 어려웠지만(지금도 쉽지는 않지만) 나를 떠나가는 이들에 대해서 미련을 갖기보다는 조금 비켜서서 그들이 떠나갈 길을 내어주었다. 나는 이렇게 점차 '상실'에 익숙해졌다.

 '상실의 시대'는 어렸던 나에게 어른이 되는 법을 알려준 책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주는 '상실'에 대하여 '그저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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