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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우 Dec 24. 2020

가끔 실패가 낯설어질 때면

 미사여구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날들을 떠올린다.

 일상의 크고 작은 도전에서 실패를 마주할 때, 우리 속은 참 쓰리다.

게다가 그 도전의 과정에 밤낮으로 매달려 노력했다면, 그 쓰림의 정도는 두 곱절 아니 세 곱절 정도 더 심해진다. 무언가를 더 해낼 힘조차도 잃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텅 빈 집안에 낙담한 채 돌아누워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일종의 번아웃.
나에게도 실패는 참 쓰리다.
이로 인해 나에게도 번아웃의 시간이 분명히 온다.

그런데 나는 다른 이들에 비해 이 시간이 조금 짧은 편이다.

 요 며칠 이루고자 했던 일들의 결과가 참 납득하기 힘들었다.
3개월 밤을 지새우며(친구 녀석들과 주고받은 우스운 표현을 빌리자면 '종종 자며') 매달린 일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마찬가지로 밤잠 쫓아가며, 남들보다 훨씬 많은 양의 일을 하며 진행했던 프로젝트의 보상은 남들보다 훨씬 적었다.(야속한 교수님)
힘든 일은 몰아서 온다고 이 두 일이 하루 간격으로 발생했다.(이날만은 니체가 옳았다. 신은 죽었다.)
예상치 못한 결과들에 속이 참 쓰렸고, 나의 노력이 부정당한 기분이 들어 얼마 동안 무기력했다.
한... 30분 정도?

 번아웃이라 하기엔 참 짧지 않은가?
혹자는 내가 애초에 낙천적인 성격이라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아니면 무엇이든 금방 잊어버리는 단순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둘 다 틀렸다. 나는 낙천적이라기보단 현실적이고, 생각이 단순하기보단 복잡하고 치밀한 편이다.
그렇다면 나의 '낙담 시간'은 왜 이리도 짧을까?
그 이유는 내겐 성공보다 실패가 익숙했던 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빛난다는 스무 살, 그리고 그 이듬해가 그러했다. 돌이켜보면 내일의 나를 위해 끼니는커녕 잠조차도 거른 채로 악착같이 버텨낸 수많은 날들이었다. 그렇게 계속되는 최선과 그에 대응해 최선을 다해서 내게 다가오는 실패들 탓에, 살아왔다기보단 살아냈다는 말이, 아니 어쩌면 버텨냈다는 말과 더 잘 조응하는 수많은 날들이었다. 그래도 누가 이기나 해보자며 팔 걷어붙인 채 품은, 내 혈관 가득 흐르는 독기 탓에 여름 한낮보다 뜨겁고 찬란했던 내 인생의 밤들이었다.

 날 키운 건 8할이 이 시간들이다.
내겐 이 시간들이 있었기에, 실패가 두렵지 않다. 어떠한 실패도 그때의 실패보다 쓰리지 않다.
지금의 내가 느끼는 어떠한 낙담도 그때의 내가 감당했던 그 낙담보다 심할 수 없다. 실패에서 배우고 실패를 딛고 올라설 자신이 있다. 아니 어쩌면 실패할수록 더 오기가 생기고, 비록 돌아갈지라도 훗날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렇게 마음을 먹어도 실패는 언제나 쓰리다. 어떨 땐 낯설다. 그래서 실패의 회복이 조금 더딜 때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이럴 때, 즉 실패가 낯설어질 때면 미사여구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날들을 떠올린다. 날 키운 8할의 시간들을 떠올리며, 낙담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툭툭 털고 다시 해보라고 스스로를 다그친다.

'낙담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실패하면 다시 하면 된다. 오히려 실패해서 더 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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