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성우 Dec 29. 2020

연민과 공감은 높이가 다르다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이 관계들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경험 속에서 저마다의 관계 맺기 방식을 터득한다.
그런데 다양한 이들과의 관계 맺기에 타고난 사람이 아니고서는 누구나 자신의 관계 맺기 방식 중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게 마련이다. 나의 경우에도 그런 구석이 있다. 스스로 ‘그러지 말아야지’라고 되뇌면서도 잘 되지 않는, 그래서 유독 더 신경 쓰고 조심하는 일종의 습관이 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연민과 공감의 혼동’ 정도?
  
 타고난 인복이 많은 덕에 내 주위에는 자신의 속 이야기를 터놓고 말해주는 친구들이 무척 많다. 그중에 더러는 자신의 깊은 상처나 슬픔, 내지는 남들에게 말 못 할 사정들을 말해주기도 한다. 나는 이들이 나를 믿고 해주는 이 이야기들을 감사히 들으며, 진심으로 공감하려고 노력한다.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기도,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쳐다보기도 하면서 그들의 아픔에 같이 아파하고 그들의 슬픔에 같이 슬퍼한다. 내 친구를 아프게 한 장본인 혹은 세상에 대고 ‘어디 들어볼 테면 들어봐라!’ 하며 사납게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물론 그들이 들을 리는 만무하지만)

 그런 노력의 말미에 드문드문 떠오르는 아주 못된 생각, ‘참 가엾다’ ‘참 불쌍하다’.
나는 이렇게, 연민 때문에 파생되는 자신의 생각들을 아주 못됐다고 느낀다. 나를 믿고 자신의 상처를 드러낸 당사자가 이 생각을 반길 리가 없지 않은가? 당사자의 입장에서 동등한 위치에 있는 친구에게,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이야기하고 공감을 바랐을 뿐인데 거기에 연민까지 얹어서 돌려주다니. 이건 뭐 마트의 1+1 행사도 아니고 말이지.
 내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나름의 계기가 있다. 왜, 호되게 혼난 이후에야 다시는 혼날 짓을 하지 않은 아이들이 있지 않은가? 나는 그런 아이이기 때문에.

 이미 끝나버린 사랑에 유독 아파했던 스무 살 언저리, 나는 내게 온 첫 번째 이별의 이유를 끊임없이 물었다. 스스로는 도무지 답을 찾지 못해 만나는 사람들에게 족족 그 이별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묻곤 했다. 친구들의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이를 되물으며 연거푸 술을 마시던 그 스무 살의 추운 겨울. 이 과정을 몇 번 더 반복했으나 찾고 싶던 그 이유는 찾지 못했다. 떠나간 여자의 마음을 어찌 헤아리리오! 스무 살의 내가 이 과정의 끝에 떠올린 생각은 바로 ‘많이 힘든 가정 사정이 있는 친구였는데 더 잘해주지 못해 아쉽다. 더 잘해주고 결핍을 채워줬다면 우린 헤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 따위의 것들이었다.

 상장을 받은 아이가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처럼, 나는 스스로 대견해하며 고민 끝에 건져 올린 이 생각을 주변 지인들에게 널리 퍼뜨렸다. 무언가 내가 조금 더 성숙해진 것만 같아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뿌듯함에 술자리에서 크게 떠들어대던 이 이야기를 듣던 후배 녀석이  내게 조용히 한마디 했다. 
“그거 공감도 사랑도 아니고 연민이에요. 그거 오만한 거예요”
후배 녀석의 취기 어린 말에 술자리의 분위기는 차갑게 얼어붙었고 친구들의 갖은 노력에도 나는 그 술자리를 도망치듯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민망함과 서러움이 만들어내는 완벽한 시너지에 도무지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수가 있어야지.

 다시 며칠 간의 궁리, 후배는 내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이유가 너무 궁금해 후배에게 연락해서 물었다. 그때 후배는 내게 평생 잊지 못할 말을 남겼다.
“선배가 한 거 사랑 아니라는 말 그거 진심이에요. 선배는 선배가 겪어보지도 않은 상대방의 집안 사정을 들먹이며 무언가를 더 해줬어야 했다고 말했잖아요. 선배가 뭐라도 된다고 느껴서 그런 생각이 들었나요? 선배가 그 사람한테 무언가를 해주어야 하는 이유는 없어요. 이별의 이유를 그 사람의 결핍을 채워주지 못해서라고 생각하던데, 그거 오만이에요 선배는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그 결핍을 채워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도 선배의 그런 오만한 태도를 다 느꼈을걸요? 어쩌면 크게 상처 받았을지도 몰라요”.

 후배의 앙칼진 말을 들은 후, 머리를 띵! 맞은 기분이었다. 나름대로 공감을 잘한다고 자부하던 나였는데, 내가 그때까지 사랑했던 사람에게 보여주던 태도는 공감이 아니라 연민이었을 수도 있었겠구나 하며 자책했다. 겪어보지 못했으면서 함부로 상대방의 아픔을 재단하고 함부로 다루려 했던, 그래서 어쩌면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 주었을지도 모를 내 스스로가 참 많이도 부끄러웠다. 그날이 바로 내가, 앞으로 누군가의 아픔을 보거나 듣게 되더라도 진심으로 공감하되 연민이라는 오만을 범하지 말자고 뼈에 새긴 날이다.

 지금도 많이 부족하고 잘 안 되지만, 나는 부단히 노력한다. 타인에게 건네는 나의 공감이 혹여 오만한 연민이 아닐지 예민하게 경계한다. 연민이 조금 높은 곳에서 상대방을 굽어보며 불쌍히 여기는 태도라면, 공감은 상대방과 같은 높이에서 상대방의 아픔을 듣고 함께 아파하는 거라고. 연민과 공감은 높이가 다르다고. 나는 조금 더 몸을 낮춰서 상대방에게 연민이 아닌 공감을 건네는 사람이 되겠다고. 스무 살의 기억은 오늘도 나 스스로를 돌아보며 다짐하게 만든다.   

작가의 이전글 삶이 담긴 문장을 위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